정유정
오래간만에 소설을 읽었다. 최근 책과 관련된 유튜브 영상에서 많이들 언급하는 정유정 작가의 <진이, 진이>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에게는 다소 와닿지 않는 판타지 요소가 많아서 지루하고 허무했다. 특히 보노보와 영혼이 교차되는 부위는 다소 흥미가 있었으나 작가의 신선한 의도가 아마 여기까지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판타지적 요소를 극복할 만한 주된 줄거리 및 서사 구조를 내내 기대하며 다음 장을 확인하였으나 끝끝내 허무하게 에필로그라는 글자를 보고야 만다. 나는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볼 때 우연에 의해 전개되는 핵심 줄거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도 주연 '기우'로 나오는 아들이 계단에서 지하 대화를 엿듣다가 우! 연! 히! 품에 안고 있던 돌을 떨어뜨리며 시건 전개가 급박하게 흘러간다. 물론 긴장된 국면에서는 사소한 실수 하나 가 큰 사건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주된 플롯 자체가 오로지 그러한 우연적 요소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중요한 사건이라면 그러한 우연은 반드시 필연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어야 한다. 마치 세계대전이 '사라예보의 총성'이라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사건으로 발발하듯이.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핵심 되는 서사는 바로 여주인공 진이의 영혼이 지니로 이입되는 과정이다. 그러한 것이 물론 소설이라는 허구적 장치 또는 재미를 위한 장치라는 점으로 어느 정도 용납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날 장 교수가 과속 운전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야기는 대부분의 우리네 일상이 그러하듯이 별 일 없이 흘러갈 것이다. 너무 로맨스가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 교통사고 비율은 최근 들어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며, 특히나 교통사고로 인한 운전자 및 동승자 사망률은 눈에 띄게 감소하였다. 더 이상 기억 상실 혹은 교통 사로고 인한 불운은 흔한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노화로 인한 알츠하이머성 치매나 혈관성 폐색으로 인한 치매로 인한 인지장애가 더더욱 현실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렇게 우연하게 발생하는 교통사고, 또한 우연히 그 주변에서 노숙하고 있던 젊은이의 구조로 인해 이야기의 주된 흐름이 전개된다는 점이 읽는 내내 아쉬웠다.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을 구상할 때가 아니라, 새로운 통찰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 비로소 가치를 발한다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만큼 세세한 장면 묘사와 서술 방식은 본받을만하였다. 작가 특유의 높은 공감 능력을 토대로 보노보와의 재회 장면 및 보노보 관점에서 바라보는 밀림 혹은 사육장의 광경은 그녀가 유명 소설가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생동감 있는 묘사를 할 수 있을 만큼 평소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소설가의 눈과 귀가 부러운 이유다. 다만, 소설의 전개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긴박한 전개과정뿐만 아니라 좀 더 현실감 있는 메시지로 전달되었다면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으로 남지 않을까.
어느 정도 기대는 하였지만 허무했던 소설의 결말만큼이나 당분간 비소설에 집착하게 될 것 같다.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도 완성도를 가질 수 있는, 고전 명작이 더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