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스로 학습을 즐기고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
"빨리빨리"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다. 요즘 들어 그런 게 아니라 예전부터 우리는 언제나 빨랐다. 농경에서 공업, 거기서 다시 정보화시대로, 서구사회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를 불과 5~60년 만에 압축해서 겪었다. 이런 경향은 점점 더 심해져 2024년 트렌드는 1분 1초까지 따지는 '분초사회'가 될 것이라고 한다. 확실히 한국인은 체질적으로 느린 것을 못 견뎌한다. 인공지능 연구자 맥스 테그마크는 느리디 느린 진화의 과정에 '문화'로 불리는 배움의 결과물을 쌓기 시작한 것이 다른 생물과 인간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어쩌면 한국인이야말로 진화에 문화를 더한 가장 앞선 사피엔스, '호모 에루디티오'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한국사회가 2배속, 3배속으로 가속되는 와중에 배움이 '수박 겉핥기'에 그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배움을 돕는 네 가지 기둥을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배움의 네 기둥
주의, 적극적 참여, 에러 피드백, 통합
2017년, 구글브레인 팀에서 인공지능 관련 논문 하나를 발표하였다.
Attention Is All You Need
현재 인공지능의 대명사로 불리는 '챗GPT'를 비롯한 '거대언어모델(LLM)'의 기본 골격이 되는 '트랜스포머' 구조가 담겨있다. 주의(Attention)에 주목한 최초의 모델로 이후 AI가 획기적으로 똑똑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의 '배움 모델'도 마찬가지이다. 정보 포화를 막고 한정된 자원을 적절히 할당하기 위해선,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에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정보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시급하거나 위험하거나 매혹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주의가 가는 것, 다른 하나는 내가 설정한 목표에 부합되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쁜 여자를 보고 눈이 돌아가는 게 전자라면, 테슬라 전기차를 사기로 마음먹은 후 거리에서 테슬라가 자주 눈에 띄는 것이 후자의 경우이다. 주의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100%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주의를 두지 않는 대상은 어둠 속에 묻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에 주의가 쏠린 아이는 다가오는 차를 보지 못한 채 차도에 뛰어들기도 한다.
동시에 두 가지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100퍼센트 착각이다. 우리의 뇌는 정보를 한 번에 하나씩 처리한다. 여러 일을 동시에 하려 할 경우 주의가 분산되어 일이 지연되고 시간과 노력이 낭비된다. 최적의 학습을 위해서는 뇌의 주의 분산을 피해야 한다.
'단어 처리 깊이' 효과: 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문장을 이해하려는 학생이 훨씬 더 정보를 잘 기억한다. 새로운 개념을 잘 소화하기 위해, 그 개념을 자기 나름의 말이나 생각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14년 전, 25일 간 나 홀로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다년간의 일본게임덕후 활동 덕분이었다. 건담에 환장하던 시절이라 '건담 트루 오딧세이'라는 게임을 무작정 샀다. 일본어로 된 게임인데 비주류여서 공략집도 없었다. 대사가 꽤 많은 RPG게임이었다. 모르는 글자투성이라 답답하기도 했지만 팬심으로 일본어사전을 뒤져가며 스토리를 진행해 나갔다. 한 달쯤 지나 중반쯤 진행할 무렵부터는 사전 없이도 해석에 큰 무리가 없는 독해 수준이 되어 쾌적하게 아주 몰입하여 플레이했던 기억이 난다. 적극적 참여를 통해 높게만 보였던 일어의 장벽을 넘어선 것이다.
내가 적극적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뭔가를 알려는 거부할 수 없는 욕구, 호기심이다. 일본어가 느는 만큼 이해되기 시작하는 스토리가 학습의욕을 늘려주었고, 수많은 애니메와 게임을 접하며 눈과 귀에 익은 글자는 너무 단순하지도 너무 복잡하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복잡성을 가져 배움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주었다.
절대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뿐이다.
- 시어도어 루스벨트
뇌는 자신이 예측한 것과 실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을 때 배우기 시작한다. '예상 밖의 놀람'과 같은 에러 신호 없이는 어떤 배움도 일어나지 않는다. 즉, 실수와 배움은 사실상 같은 말이다. 따라서 배움을 위해 모든 실수는 용납되어야 한다. 단 개선 방법을 알려주는 피드백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믿기지 않겠지만, 비디오 게임이야말로 배움을 확실하게 일으킬 수 있게 구조가 짜여 있다. 플레이가 시작되면, 뇌가 적절한 감각 입력 정보를 선정하고(주의), 그 정보를 활용해 예측하며(적극적 참여), 그 예측의 정확도를 점수나 게이지를 통해 즉각적으로 확인시켜 준다(에러 피드백). 적을 발견하고, 공격해서, 경험치를 획득한다. 직관적이다. 실패하면 여러 차례 재시도의 기회가 주어지고, 게임 점수가 차근차근 올라가는 걸 보게 된다. 그러다 기어코 최종보스를 잡는 날이 오게 된다. 미션 클리어. 신속하고 정확한 피드백의 힘이다.
현실 세계에서 미션 클리어가 어려운 이유는 뭘까? 바로 초보자와 숙련자를 동일한 '하드 모드'로 플레이를 시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무나 자주 성적을 처벌 수단으로 이용한다. 낮은 성적을 매겨 아이들에게 처벌을 가하는 것은 발전을 가로막는 행위이다. 스트레스와 좌절감으로 인해 아예 학습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해법은 스스로 자기 수준에 맞는 테스트를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적이 아닌 노력을 기준으로 보상을 주면서 하루하루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최근 급격히 발달한 AI 기술은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수준별 맞춤학습의 실현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사당오락(4시간 자야 대학교에 합격할 수 있고 5시간 이상 자면 떨어진다는 의미)"
학생을 포함하여 배움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잠만큼 홀대받아온 일상도 없을 것이다. 적게 자면 잘수록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신화는 우리의 뇌리에 뿌리깊이 박혀있다. 하지만 수면과 학습은 아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효과적 배움은 두 가지 모드의 발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는 낮 동안 지식 습득에 사용하는 '각성모드'이고, 다른 하나는 수면 시간에 이루어지는 '통합모드'이다. 잠자는 동안 우리 뇌는 새로운 정보를 전혀 흡수하지 못한다. 대신 이미 경험한 것들을 재활성화 또는 재연한다. 달리 표현하면 낮에는 실제 세계에서 경험하고, 밤에는 가상세계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고 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이기 때문에 평생 가도 다 경험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을 잠자는 시간 안에 아주 빠른 속도로 경험해 볼 수 있다. 이를 통한 이점은 아주 많다. 망각을 막아주고, 자동화를 통해 처리 속도를 빠르게 하며, 여러 지식들을 연결 지어 통찰력이 생겨나게 한다.
수면은 학습 알고리즘에 없어선 안 될 부분이며, 낮의 경험을 10배에서 100배 가까이 증폭시킨다. 만약 외국어나 고등수학처럼 복잡한 걸 배우려면, 낮에 연습하고 밤에 자면서 이미 습득한 것들을 재활성화하고 통합하는 게 효과가 있다. 다만 잠을 많이 잔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다. 낮 동안 충분히 지식을 습득하여 통합할 거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AI를 훈련시키는데 양질의 빅데이터가 필요하듯,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잠들기 직전에 중요한 내용을 공부하면 수면 중 뇌 세포의 재활성화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