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57화 / 6장 땅이 흔들리다
장편소설 빛의 여정 57화 / 6장 땅이 흔들리다
머나먼 북쪽의 동토, 절망의 산맥과 마주한 수많은 부족과 소왕국들에게도 소식은 빨리 알려졌다. 이그네움이 가장 많이 필요로 했던 자들이였기 때문에 디고로 파견된 자들 역시 많았다. 거센 바람이 한번 불고 나자 대륙 전역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이그네움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대륙 지도자들의 책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분배해 줄 이그네움 공급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백성에게 주지 못한다면 그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거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눈보라 치는 절망의 산맥의 언저리 야산들도 못지 않게 높이 솟아 오른 채 저 멀리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녘 땅은 언제인지도 파악하지 못할 까마득한 고대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장소다. 절망의 산맥은 험준하고 그 어떤 생명체도 산맥을 넘은 바가 없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절망의 산맥"이라 이름을 붙였다. 절망의 산맥 너머로 무엇이 있는지 혹여 어떤 땅이 있는지 조차 알수 없었다. 호기심에 인도되어 바다에서 절망의 산맥을 따라 넘어가보고자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산맥 전체와 인근 지역 모두 대륙에서 따로 분리된 공간마냥 눈보라가 수천년 간 몰아치고 있어 바다는 얼어붙어 있는 빙하지대라 결코 나아가지 못한 채 포기 해야만 했다.
노인 한 명이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조심조심 나아갔다. 그의 머리카락은 쌓이는 눈에 하얗게 물든 건지 원래 부터 백발인건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험난한 산을 올라가면서도 그는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노인은 산 정상에서 지팡이를 들고 서서 멀리 펼처진 대륙의 땅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절망의 산들이 병풍처럼 늘어진 채 높이 솟은 하얀 경관을 이루고 있었다. 노인은 잠시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의 눈도 내리는 눈처럼 새 하얗고 동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연이 가져다주는 공기의 감각과 지팡이에서 느껴지는 진동의 감각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자였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대륙을 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웠다. 심각해진 남쪽 땅의 광경을 보게 된 것일까? 아니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그 노인은 한 참을 서서 뜬 눈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북쪽과 남쪽을 잇는 다리역할을 하는 지역은 "바슬라"였다. 이 땅은 본래 북쪽민들의 고향과도 같은 땅이었지만 지역의 특성상 전쟁과 내전의 물결에 지쳐버린 사람들이 아예 절망의 산맥이 있는 북쪽으로 올라가게 되었다는 역사가 있다. 무시하지 못할 땅의 크기임에도 미개척지로 남겨진 땅들이 많은 북쪽은 험난한 산들이 자연방벽처럼 이어져 있어 자연스레 문명의 바퀴가 오랫동안 당도하지 못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인 바슬라에 젖줄과도 같은 이 땅을 다른 이들은 결코 버려두진 않았다. 북쪽민의 강인함과 남쪽민의 유연함이 한데 어울러진 바슬라 사람들은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지켜오며 도리어 북쪽에서 몰아치는 공격을 남쪽의 수많은 세력과 연대하여 대신 막아주는 성벽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은 한 쪽에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만약 남쪽민들이 자신들의 등에 비수라도 꽂는 짓을 한다면 기꺼이 이들은 북쪽민들과 동맹을 맺은 역사 또한 수도 없이 많았다. 북과 남을 가르는 기준 중 하나인 큰 강 "메자사"가 흐르고 강이 꺾이다가 남쪽의 드넓은 평야를 관통하여 흐르고 있었다. 그곳에 바로 바슬라가 위치해 있었다. 바슬라는 여기서도 관문 역할을 하며 많은 중개무역으로 헤르논과 함께 번영하던 왕국이었다.
디고에서 번져나가는 이교도 탄압은 바슬라에게도 알려졌다. 사실 바슬라는 최근까지 아넬피스가 "사망하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들려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왠걸? 하루 아침에 몰라보게 건강해진 아넬피스가 이그네움을 발명하고 자신의 왕국을 강력하게 만들고 있어 바슬라는 놀라게 되었다. 소식이 들려질 당시엔 아보테 상황이 여의치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북쪽의 왕국들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이후 난감해진 바슬라 측에서는 영원한 추위로 인해 사람들 수 십명이 매일 같이 얼어죽는 것을 보고나서야 급히 아쉬운 소리를 아보테에게 했어야 했고 자존심을 내려놓아야만 했다. 철저히 세속 권력에 속한 바슬라 국왕은 발명품인 이그네움 확보에만 관심이 있었지 아보신앙인지 무엇인 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대륙 전역에서 아보의 형제들이 이단자 척결에 나선 것을 보자 머릿 속의 계산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의 고뇌를 풀어주려는 기회가 때 마침 왔다. 북쪽의 세력연합 중 호전성이 강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한 "아디일라"의 왕 "피네로"가 바슬라 국왕 "메토네메우스"의 만찬에 초대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던 것이다. 메토네메우스는 피네로의 인상착의에 놀랐지만 뭐라 할말은 없었다. 피네로는 곰가죽을 마치 통째로 벗겨내 만든 상의와 하의는 짧은 속옷처럼 입고 있으며 보이는 피부란 피부에는 수많은 문신을 했기 때문이다. 메토네메우스가 말했다.
"그대가 원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오 바슬라 국왕이여! 그대께선 하늘의 역사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으실테지요, 오직 금화와 이그네움 아니겠습니까?"
살짝 무례한 피네로의 말에 미간이 찌뿌려있었고 심기를 파악한 근위대장이 칼잡이에 손을 대려 했으나 메토네메우스는 손을 들어 막았다. 이어 그가 말했다.
"무슨 용기로 그런 말을 하는 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내 땅 한 가운데 임을 잊지 마시오. 나는 신민들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할애했소. 그대의 농담을 받아쳐 줄 여유는 없소이다만."
피네로가 씨익 웃으며 사과의 표시인지 잠시 고개를 내렸다. 그의 머릿칼에서 파리가 웅웅대는 것만 같았다. 미소를 짓는 그의 치아는 상당히 보기 흉했다.
"폐하. 우리도 이그네움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죠. 그런데 왜 항상 우리가 수동적으로만 어미새가 물어다주는 것처럼 받아먹기만 하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피네로의 말에 바슬라 국왕은 대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들이 가만히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아시다시피 천혜의 요새인 바슬라께서 눈 감아 주신다면 저희 아디일라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가져올 이그네움 더미들을 나누어 줄 그 준비 말이죠"
살짝 솔깃해진 바슬라의 국왕 메토네메우스는 조용히 얼음 조각 하나를 입에 깨물어 넣었다. 피네로는 멈추지 않았다.
"폐하, 저의 신민 그리고 그들의 젖먹이 아들과 딸까지 아보테가 미쳐 날뛰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미친 황소를 제어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다리는 것이고, 둘째는 멱을 따버리는 것입니다. 기다리기엔 추위가 극심해 우리가 버티질 못하겠으니 멱을 따고 그들의 뱃속에서 이그네움을 꺼내와 우리 신민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물론 바슬라와 함께 말이죠"
메토네메우스는 의자 팔걸이에 잠시 자신의 팔꿈치를 대고 손에 머리를 기댄 채 무표정으로 피네로가 데려온 병사 중 하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사람들도 하나같이 대놓고 거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거인은 사람키의 두배가 되는 장정으로 거대한 도끼와 망치 자루를 잡고 서서 피네로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인은 피네로가 데려온 병사들 중 유일한 자는 아니였다. 수십명의 거인들이 메토네메우스의 궁전 밖에서 일반 호위병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과 함께라면?"
거인을 바라보던 메토네메우스의 머릿 속에 스쳐 지나간 물음이었다.
58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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