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문 앞에 서서
7월의 어느 토요일, 합창단 연습을 하다가 도망치듯 집에 돌아왔다. 한 소절 한 소절 부르기도 힘이 들어서, 안 나오는 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연습을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도망치듯 빠져나와 텅 빈 집 안에서 숨을 골랐다.
...
치료도 받아보고 여러 가지로 갖은 노력을 해봤지만, 원하는 대로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노력할수록 더욱 악화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결국, 난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포기하는 게 맞겠다고 인정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음먹어진 게 아니었다. 누적된 마음의 고통이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꼈다. 그동안 노력해 온 시간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이제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접어야만 하는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근차근 마음을 정리했다. 무대에 마지막으로 설 나의 모습을 상상했다. 또는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볼 나의 모습도 상상했다. 전부 마지막일 모습이었다.
진료실에서 이런 나의 마음을 말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입원하고 싶은 마음,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같이 든다고.
"포기하고 싶다는 표현만 들으면 뭔가 안 좋은 결정을 하는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면 나한테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하는 것 아닌가요?"
- "맞아요. 저를 위해서 포기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생쥐가 레버를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실험 장치가 있다고 해봅시다. 생쥐는 레버를 눌러서 먹이를 먹고, 또 눌러서 먹이를 먹고, 이걸 반복하겠죠. 근데 눌러도 먹이가 나오지 않게 세팅을 바꿨어요. 생쥐는 그래도 먹이를 먹으려고 계속 레버를 누르겠죠? 이전에 무대에 계속 서려고 했던 김마음 님의 모습이 이런 생쥐의 모습 아니었을까 싶어요. 근데 생쥐가 레버를 누르는 걸 포기하는 게 나쁜 걸까요? '이건 더 이상 내 즐거움의 원천이 되지 않아. 여기선 만족감을 얻을 수 없어.' 그걸 깨닫고 똑똑하게 행동하는 것 아닐까요? 김마음 님이 '포기한다' 말씀하신 것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빼고 생각해 보면, 더 이상 나에게 먹이가 안 나오는, 즐거움이 안 나오는 곳에다가 더 이상 힘을 쓰지 말아야겠다고 똑똑하게 판단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 "근데 그걸 인정하기가 어려워요. 이제 나한테 도움이 안 되고, 나한테 즐거운 일이 아니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라는 거. 노래가 나한테 이렇게 힘든 일이구나, 그만해야겠구나 그걸 인정하기까지 몇 년이 걸린 것 같아요. 이제는 정말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앞으로 무대에 못 설 것 같아요. 그래서 올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 건데... 너무 아쉬워요. 상담 선생님이 그런 말씀하셨거든요. 내가 포기하는 것들에 대해서 애도가 필요하다고.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고. 그래서 포기해야지 생각하면서 계속 혼자 애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근데, 너무 하고 싶어요."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걸 계속 부인해 왔고, 괴로웠어요. 지금은, 마찬가지로 괴롭지만,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수용하고, 애도하고 계신 것 같네요."
- "너무 어려워요. 너무 아쉽고 슬퍼요."
"슬픈 일이에요. 내가 그렇게 좋아했고, 원했고, 한 때는 굉장히 잘해서 만족감을 느꼈던 그런 것을 떠나보내야 한다니 슬픈 일이죠."
-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지나 보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장 이번 주 연습부터 가지 말아야 하나, 그래도 무대까지는 서야 하나 그런 고민해요."
"애도의 방법을 선택하는 문제인 것 같아요. 지금부터 연습에 나가지 않음으로써 애도할 수도 있고, 애도의 과정으로써 의미가 있다면, 떠나보내는 과정으로써 의미가 있다면, 무대까지는 마지막으로 서볼 수도 있죠."
- "둘 다 힘들어요. 그래서 도망가고 싶어요. 그냥 입원해서 들어가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어지니까. 지금은 어디에 있어도 힘들어서."
"시간이 필요하겠어요. 모든 상실과 애도에 시간이 필요하듯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우리 곁을 떠났을 때도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노래하는 나의 죽음'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나의 일부를 떠나보내야 하는, 나의 일부가 죽었음을 인정하는 그런 과정인지도 모르겠어요."
- "그래서 잠깐 비껴있고 싶어요."
"그래서 입원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괴로움으로부터 잠시 비껴있고 싶어서."
- "안 마주하고 싶어요. 저는 지금 회사 고민도 해야 되거든요. 너무 할 게 많고, 그래서 좀 벅찬 것 같아요. 근데 계속 이 기분일 것 같아요. 더 나아질 것 같지 않고 계속 똑같을 것 같아요."
"노래하는 내가 떠난다는 상실,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있을 때의 김마음 님은 똑같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지금의 슬픔은 조금 다른 슬픔처럼 보여요. 상실을 인정하고 애도하는 슬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여요."
'노래하는 나의 죽음'
너무나도 정확한 명명이었다. 나는 그걸 인정하지 못해서 몇 년을 괴로워했고, 눌러도 먹이가 나오지 않는 레버를 누르며 수없이 좌절했다. 그 좌절 끝에 이제는 결심했다. 한 때는 내 삶의 전부였던 노래하는 나를 더 이상 잡지 않고 놓아주기로. 나의 일부를 떠나보내는 것. 내 삶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과 영원히 작별하는 것.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지는 일이지만 이제는, 정말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
노래하는 나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이후,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영상들과 녹음했던 음원들을 다 없애고 싶어졌다. 보고 들으면 아쉬우니까. 그동안 가끔 내 유튜브 영상들을 봤었다. 그 영상들을 보면 늘 같은 감정이 따라왔다. 잘 되었던 시절의 내가 반가웠고, 동시에 그 모습이 더는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이 아팠다. 그래서 점점 보기 힘들어졌다. 결국엔 지우고 싶다는 생각만 남았다.
선생님은 지금의 변한 나를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노래를 잘했던 그때의 나도 나고, 목소리가 안 나오는 지금의 나도 난데, 둘이 공존하는 게 아니라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한다는 생각인 것 같다고. 내가 죽어서 없어지던지, 노래 잘했던 나의 영상을 모두 지워서 없애버리던지. 둘 다 나라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잊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뭐든지 간에 그냥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어차피 앞으로도 없을 거니까. 선생님은 노래가 아닌 다른 취미는 찾아볼 수 없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다른 취미는 다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다른 걸 아무리 다 합쳐도 나에게는 완전한 즐거움이 되지 않는다고.
"완전한 즐거움이 아닌 건 받아들일 생각이 없나요?"
- "네. 그냥, 재미가 없어요."
"이건 마치 아버지께서 1등 아니면 의미 없다 하신 것과 비슷한 것 같아요. 재미가 덜하지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2, 3등의 가치가 1등보다 덜하지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예 가치가 없는 것처럼 말하시네요. 1등이 아니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 "뭘 해봐도 노래보다는 못하니까, 아 이건 역시 나한테 맞는 취미가 아니구나, 나한테 맞는 무언가는 아니구나 계속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덜한 건 덜한 건데 아니구나가 되어버리잖아요. 재미가 덜한 거지 재미가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
- "그러네요. 제가 생각을 바꿔야 되는 거죠?"
"선택이죠.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계속 흑백논리로 살아갈 것인가, 회색을 허용해 줄 것인가. 그만큼 하얗고 까만 것은 아니지만, 노래만큼 즐거운 무언가는 아니지만, 그보다 덜한 즐거움, 만족, 그런 걸 나한테 허용해 줄 것인가. 선택하는 거죠."
'너 1등 해본 적 없잖아' 머릿속을 스치는 아빠의 말이었다. 이런 사소한 말 하나하나가 쌓여 내 삶의 규칙이 되어버렸고(내가 절대 얻고 싶지 않았던 규칙이다), 인생에 있어 아주 작은 결정인 취미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나는 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즐거움... 즐거움 말고 또 무엇이 있었을까. 나는 노래가 좋아서 노래를 부른 것도 맞지만, 어떻게 보면 칭찬을 받으려고 불렀던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는 노래가 칭찬이 나오는 레버였던 것이다. 내게 늘 부족하다 느꼈던 칭찬을 마음껏 쌓을 수 있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래를 부른다는 건 오랫동안 결핍되어 온 칭찬을 채우려는 욕구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하는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그래서 더 무서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유일하게 칭찬받을 수 있는 창구였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일이라. 나에게는 아직도 칭찬의 결핍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 칭찬의 결핍은 정서적 지지가 부족했던 유년시절부터 이어져 온 것이고, 앞으로도 쉽게 채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나의 결핍과 취약함은 모두 내면의 어린아이와 연결되어 있다. 내 내면의 어린아이는 언제나 외롭고, 두렵고, 무섭다. 왜일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아이는 혼자 남아 울고 있다. 도대체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든 건 누구였을까?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아이를 어떻게 안아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