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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들 Dec 04. 2023

반찬거리도 사고 밑반찬 가져와야 하거든

마른 명태포, 깻잎, 오이장아찌, 아부래기, 라면 10봉

반찬거리도 사고 밑반찬 가져와야 하거든

 


         

깊어가는 가을밤, 풀벌레 우는 소리가 한결 처량함을 더해준다.


그동안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니? 주일에 몇 번 전화하려다 말았다. 학교에서 9월 13일 일요일 운동회를 하기에 쉴 틈 없이 몹시 바쁘다. 널 본 지도 여러 날 지났다. 보고 싶다. 하루하루 보내며 너를 생각하니, 흐르는 시간은 너무 지루하고 짜증만 난다. 늘 너와 함께 지내며 끊임없는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싶은데, 현실은 운동회 연습하느라 목청껏 소리 지르고 있다.  


        

承弟야!

양가(兩家)로 편지를 보냈다. 공히 너와 나 사이에 대해 정리해서 보냈다. 주님 뜻이길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썼으니, 우리는 탄탄한 기도로 뒷받침해야 한다. 특히 양동으로 보낸 편지는 그간의 우리 관계에 대해 바로 인식시키고 이해를 구하고자 진지하게 썼다. 추석 때, 식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기 바란다.      


암천리 생활이 말이 아니다.
반찬도 없고, 밥맛도 없고, 계속되는 운동회 연습으로 피로는 쌓이고.
‘네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금주 9월 11일 금요일에 상광(上光) 한다. 반찬거리도 사고 밑반찬 가져와야 하거든. 하지만 널 만나지 못할 거야. 왜냐하면 9월 11일 운동회 총연습으로 늦게 광주에 가게 될 것 같다. 하필 태풍 에그니스로 유치면 내 도로 교통이 두절되어 장흥까지 가서 버스를 타야 한다. 그러면 밤늦게 광주 도착, 다음날 새벽차로 다시 장흥으로, 유치로, 암천리로 내려와야 해. 어쩌면 바빠서 못 갈지도 몰라. 갈팡질팡하는 내 심정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承弟야!

갑자기 전기도 안 들어와. 캄캄한 암천리라서 어둠을 등불 삼아 운동회 준비하는 야속한 상황이다. 환한 광주가 그립구나. 아, 보고 싶은 承弟야! 지금 너에게로 향하는 한없는 그리움, 보고 싶은 마음, 참아내기 힘들구나. 만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꾹 참자.  

   

건강에 유의하며, 잘 먹고 학교생활 잘하기를, 주님께서 늘 너와 함께 하길 기도드리마. 안녕.


         

1981.09.07.(월) 浩兄    

 

p.s) 주중에 마른 명태포, 깻잎, 오이장아찌, 아부래기, 라면 10봉 좀 사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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