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지 않다(비가 미스트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내 몸은 남들과 다르다(왼쪽 폐의 절반이 사라졌다), 컨디션이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았다 등등...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고민하는 내게 결정타 한 방을 멋지게 날려준 이가 있었으니, 버스를 운전해 주시는 ○부장님!
무조건 가보셔야 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경치로 말하자면 한라산 정상을 오르는 것보다 100배는 더 좋을 거라며, 날씨도 하늘이 돕고 있다는 둥 식사도 옆자리에서 하는 적극성을 보이며 부추겼다.
'에라 모르겠다, 가보자 설마 숨이 끊어지기야 하겠어?'
스틱을 챙기고 새 신발(여유분 한 켤레는 바닥이 닳아있어 미끄러울 거 같았다)을 신고 바지 끄트머리도 양말 안에 가지런히 모아 신으며 손을 모았다. 부처님과 예수님 성모마리아 님, 세상의 모든 신에게 안전을 기원했다.천천히 가더라도 쓰러지지 않고 오를 수 있기를,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오를 수 있기를, 무너지더라도 꺾이지 않고 내려올 수 있기를...
십 년이 더 지난 초겨울에 멋모르고 올랐던 윗세오름의 설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는 '주목'을 처음 보았고, 눈꽃과 함께 여기저기 누운 듯 서있는 자태에 반해 한동안 머릿속을 온통 채웠던...
이제야 그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본다. 몸도 마음도 아플 만큼 아프고 난 이제야.
어리목 쪽에서 올라가 영실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같이 오르기로 한 일행들이 그 코스가 조금 덜 힘들 거라고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저 따를 수밖에.
끊길 줄 모르는 오르막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임에도 얼굴에서 뚝뚝 땀이 떨어졌다.
마치 내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부스러기들이 땀이 되어 쏟아져 나오는 듯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주변 공기가 상쾌했음에도 깊은 호흡이 되지 않았다.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을 본 일행은, 괜찮겠냐고 물었고 대답조차 버거웠던 나는 손짓으로 먼저 올라가라고 말해주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오르는 두 가족이 있었다. 아이들의 대화소리를 들으니 엄마들은 자매인 듯했고 어른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아이들을 격려하고 이끌고 달래 가며 함께 오르고 있었다. 앞서가던 아이의 입에서 어느 순간 불만 가득한 하소연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자리에 풀썩 앉아버렸다.
다 왔다고 한 게 한 시간이 넘었다고! 또 한 시간 더 가서 다 왔다고 하려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뻔한 거짓말을 해야 하는 부모의 마음과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이끌려가는 아이의 마음을 알 것 같았으니까.
이야! 아줌마보다 훨씬 잘 올라가네 진짜 거의 다 왔어 저기 앞에 하늘 보이지?
아이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직 보일리가 없는 하늘 운운하는 낯선 아줌마 또한 뻔한 거짓말을 하는 어른일 뿐임을 알았으리라,때론 뻔한 거짓말이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하는 명약이 된다는 것을 아이는 커가면서 알게 되리라.
갑자기 눈앞에 암벽을 두른 산이 보였다. 한라산 서벽이라고 누군가가 알려주며 기운을 실어주었다 정상이 코앞이라며... 코 앞에 다다르니 눈앞에 넓은 쉼터가 한껏 팔을 펼치며 환영해 주었다.
윗세오름 정상에 도착했다. 반만 남은 왼쪽 폐로 1,700m 고지에 올라섰다. 해내고야 말았다. 여기까지 잘 왔다 가탁아!
내려오는 길은 끝없는 내리막이었다. 내리막이 시작되는 자리에 선 순간, 수년 전 예기치 못했던 암진단으로 순식간에 내리막으로 곤두박질쳤던 생각이 났다.
멈추지 않고 내려가는 어리석음을 막기 위해 산은, 작은 걸림돌을 내어주며 순간순간 멈춤의 중요성을 잊지 않게 해 주었다. 인생도 그러했으리라. 멈춤이 필요했던 순간에도 멈추기를 거부한 탓에 순식간에 떨어졌던 것이리라.
멈춰 서서 뒤돌아본 길은 오를 때보다 더 너그럽게등뒤에서 내 몸과 인생을 잡아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