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천을 거닐며
가을을 알리는 선선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에 마음이 싱숭생숭 널 뛰던 9월 어느 날,
‘우아아앙~ 슈와아앙~’ 집진기와 재단기가 죽어라 괴성을 지르는 가운데 침을 질질 흘리듯 땀을 흘리며 목재를 재단하고 있었다. 그때, 등뒤로 누군가 스윽 나타나 어깨를 툭 쳤다.
“ㅅ ㅂ!! 깜짝이야!”
너어무~ 놀란 나머지, 바보, 멍청이 밖에 모르는 내 입이 습관처럼 욕을 뱉었다.
언제 닌자의 기술을 익혔는지, 발걸음 소릴 없애고 그림자처럼 나타난 이는 알바하면서 만난 20년 지기 동생 A였다. 기계를 끄고 A를 맞았다.
"뭘 그렇게 놀래요? 지은 죄가 많은가 봐요."
A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난, 쌍수를 들어 환영하곤 A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왜 이렇게 말랐어? 죄는 네가 지은 것 같은데?!”
워낙에 마른 체형이었는데, 이 날 모습은 피골이 상접해 마치 미라 같았다.
“돈도 좋지만 건강은 챙겨가며 일해. 그러다 탈 나겠다. 대낮부터 웬일이야? 오늘 쉬는 날이야? 날씨도 좋은데 여친이랑 데이트 안 해?”
A를 스툴에 앉히곤 커피믹스를 탄 종이컵을 건네며 질문을 쏟아냈다. A는 대꾸는 않고 종이컵을 손바닥 안에서 천천히 돌리기만 했다.
"저 그만 뒀어요! 아니... 잘렸다고 해야 하나?"
또다시 놀랐다. (욕은 하지 않았다.) A의 직장은 각종 손잡이를 만드는 중소 제조사였다. 조립 파트에서 10년째 근속하며 결근 한번 없었고 오히려 휴가도 반납하는 열의를 보이며 회사에 헌신한 그 였는데. 회사에서 잘렸다니. 무슨 일인지 정확히 말해보라고 차근히 다그쳤다.
"회사가.... 망했어요...."
내가 망한 것도 아닌데 심장이 싸했다. 씁쓸한 미소를 짓던 A는 그제야 커피를 한 모금했다.
이 회사에서 정년을 바랐던 A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좋을지.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분위기가 한없이 주저앉았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 A의 기분을 헤아려 한마디 했다.
“뭐, 요즘은 망하는 게 트렌드잖아! 하하하하하!”
나만 웃었다. A는 커피를 다 비우곤 일어서며 말했다. 형은 언제나 해맑아서 좋다고. 칭찬이지?라고 묻자,
A는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 못 해요? 했다. 음.... 욕이었다. 놈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그렇게 장난치니 A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정오라 점심을 먹자고 하니, A는 지방으로 내려갈 건데 가기 전에 잠깐, 얼굴 보러 왔다며 나중을 기약했다. 배웅도 할 겸 공방 앞 우이천을 잠시 거닐자고 A에게 제안하니 흔쾌히 승낙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티베트 속담처럼 해 봤자 답도 걱정을 조금이나마 떨쳐내고 정신을 맑게 하는 데는 산책 만하게 없다.
A는 이런 곳이 있었냐며 숨을 깊게 들어마시고는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말없이 풍경을 훑는 시선이 꼼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우이천의 조화롭고 넉넉한 푸르름이 마음에 드는지 A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30분가량의 산책을 끝냈다.
“잘 지내세요. 내려가서 자리 잡으면 연락드릴게요.”
A는 처진 어깨를 애써 추켜세우며 웃고는 돌아섰다. 저만치 멀어지는 깡마른 A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다 잘 될 거야!” 이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럴 리 없으니까. A에게 닥친 상황이 비단 그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나와 같은 자영업자들의 상황도 절벽 끝에 있다. 모든 분야에서 붕괴가......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이쯤에서 생각을 멈춰본다. 걱정은 하면 할수록 곱절로 늘어나니까. 마음에 드리운 먹구름 때문인지 우이천의 화창한 풍경이 어둡게 느껴졌다.
(맞다. 그림이 어두워서 그런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