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계 默契
세 발 할머니가 'ㄱ'자로 길을 간다
차도를 횡단하는 달팽이 아이콘 하나
경적이 울지 않는다,
자음 첫 자에 대한
경배다.
김진길의 시 '묵계 默契' 전문 [화석 지대](지혜, 2016)
길을 가다 보면 가끔 마주치는 광경.
허리는 굽고 무릎은 다 닳아서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께서 지팡이에 의존한 채 느릿느릿 횡단보도를 건너신다. 마음 따로 몸 따로. 아무리 이를 악물고 서둘러도 간신히 시간 안에 도달하거나 바뀐 적색 신호를 물고 남은 거리를 마저 건너야 한다. 위태롭기 짝이 없다.
그나마 횡단보도라도 가까이 있으면 다행.
신호등이 있는 곳까지 이동할 엄두가 나지 않을 때는 도로 한복판을 그냥 가로지른다. 대단히 위험하고 무모한 선택이지만 성치 않은 노구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운전자들은 당황스럽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쓴다.
운전대만 잡으면 잠재되었던 성질머리가 불쑥 치밀어 오르고, 또 가끔 서두르다가 교통법규를 위반하기도 하지만 차도에서 이런 모습을 만날 때면 멈추어 설 줄 안다. 달팽이 아이콘 같은 노파께서 느릿느릿 도로를 안전하게 건널 때까지 멈추어 서서 기다린다.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지도 않는다. 자음 첫머리, 즉 어머니의 어머니에 대한 배려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묵계'다. 그래서 아직은 희망이 있고 살만한 나라이다.
- 묵계 : '말없는 가운데 서로 뜻이 통함. 또는 그렇게 하여 성립된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