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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Mar 04. 2024

Chater3.(2) 우리가 사는 세상

인간이 ‘신(神)'을 빙자하여 스스로의 오만을 정당화하다.

어려운 삶의 고비를 넘기고 넘기며 발전을 거듭하여 마침내 문명화(Civilization)를 이룩한 초기 인류 공동체들에게 남은 것은 '자신들만' 이 지구상에서 계속해서 생존과 발전을 거듭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보다 더 많은 먹거리와 더 나은 생활 환경을 확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쟁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앞선 이야기에서 이러한 경향이 소위 '보편종교' 가 등장하면서 잦아들었다고 칼 야스퍼스의 관점을 근거로 말씀드렸는데,  개인적으로는 '정말 줄어든거 맞나?' 싶을 정도 입니다.

제1차 십자군원정 묘사 그림 (CC0 image, Wikicommons)

십자군 전쟁을 떠올려볼까요? 사실 이 전쟁은 그 이면에 많은 함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CE 313 밀라노 칙령으로 가톨릭(기독교)을 정식 종교로 인정한 이래 기독교는 유럽 전반에 널리 퍼져 나감으로써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이자 핵심 사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CE 6세기 후반~7세기 초 홍해 연안에서 가까운 메카를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출현하였는데, 이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중앙아시아, 흑해 연안, 동부유럽, 그리고 북 아프리카 지역까지 전파되었습니다.  특히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출현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유목민족 셀주크투르크 세력이 CE1071년 비잔틴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CE1077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서 기독교 공동체를 이끄는 교황과 사제, 귀족 등 일부 기득권 층들은 점차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로 결심했고, 그렇게 제1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표면적인 명분은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지역을 회복하고 기독교의 가치를 온 세상에 널리 퍼뜨리겠다는 것이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더 밀리면 끝' 이라는 생존과 번성에 대한 기득권 층의 갈급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1차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 수복이라는 목표를 '일단' 달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황의 영향력 하에 있는 서유럽 국가들을 위협했고, 그 때마다 교황을 위시한 기독교 세력은 십자군을 일으켜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무려 CE1270년까지 약 200년 동안 8차례의 원정을 거듭했지만 기독교 세력은 이슬람 세력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보다 강성해진 이슬람 세력은 오스만 제국으로 거듭났고 이들은 CE1453년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다음 서남아시아와 북 아프리카, 그리고 중부와 서부유럽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무분별한 희생자를 가져왔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한 책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직,간접적인 사망자가 약 100만명에 달한다고 알려져있습니다.¹ 게다가 이 당시 시작된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 갈등은 약 1,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이쯤되면 인류를 갈등과 반목으로 몰아넣은 것이 종교라는 관점에도 일리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종교가 인류에게 쓸모 없거나 유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불교와 같은 보편종교가 추구하는 핵심 사상은 ’사랑‘, ’희생‘과 같은 숭고한 가치들입니다. 그래서  불확실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지만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심적으로 큰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었고, 점차 보다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그들끼리  협력 관계를 형성시키고, 나아가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면서 각 종교별로 핵심 사상을 퍼뜨리는 성직자들이 공동체 안에서 큰 힘을 갖게 되었고 기득권화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가 자신들이 믿는 신을 ’참칭‘ 하면서 인류 집단 간의 갈등과 분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즉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도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낮아지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그들 휘하에 있던 왕과 영주들을 움직여 ‘신의 뜻‘을 빙자하여 무리하게 십자군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실패로 끝났고, 이들 사이의 결속력도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반면 200년에 가까운 전쟁으로 인해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와 서유럽 간 무역 등의 교류가 활성화 되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CE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창궐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흑사병은 유럽인구의  1/3을 감소시켰다고 알려질만큼 사회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²  ‘신이 흑사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라는 경험을 하게 된 서유럽 사람들은 이를 계기로 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우리 역사, 특히 고려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자신들의 사상적 뿌리인 불교를 중심으로 이겨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산물이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고려 안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냐면 CE1259년 현종이 몽골에게 항복을 선언했음에도 일부 승려들과 군인들은 삼별초를 조직하여 끝까지 맞서 싸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침입자에 맞서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적극적으로 지켜내는 데에 힘써야 한다는 호국불교 정신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호국불교의 가치는 고려를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무신정권기와 몽골(원) 간섭기를 지나면서 고려의 정치, 사회, 경제 중심이었던 사원(절)의 재산이 쌓이고 ‘세속’의 맛을 본 일부 승려들이 국가적 의사결정을 좌지우지 했기 떄문입니다. 이러한 일부 계층의 부조리함이 계속되면서 불교의 신뢰도는 점차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고려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멸망했고, 불교 대신 성리학을 내세운 조선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³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결국 앞선 이야기들의 핵심 메시지는 문제의 본질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나 석가모니의 사상과 일화는 분명 사람들에게 이로운 도덕적 가치를 가져다 주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이러한 선한 의도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권력과 사적 이익을 취하는 데에만 골몰했기 때문에 파국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만해진 인간에 대한 신의 심판이었을까요? 아니면 사람들이 ‘신은 없다’ 라는 꺠달음을 얻어가는 여정이었을까요?  어느쪽이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신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1. Wertham, F. (1966). A sign for Cain: An exploration of human violence, 140p, Macmillan. 

2. 흑사병을 비롯한 전염병이 유럽과 인류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에 관해 좀 더 살펴보고 싶다면 재래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2005) 11장>, 박한선&구형찬의 <감염병 인류 (2021)>를 추천합니다.

3. 고려의 역사를 조금 더 살펴보고 싶다면 한 권으로 파악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박종기의 <새로 쓴 오백년 고려사(2020)>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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