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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Oct 09. 2024

[에필로그]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한 것일까요?  개인적으로는 낙관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우리 앞에 놓인 기후위기 문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탄소배출을 줄여야한다는 명제에는 대부분 동의하지만 탄소를 줄이기 위한 실천에는 인색합니다. 그것들-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 이용 또는 걷기, 텀블러나 다회용기 사용하기, 에어컨이나 난방기 사용 줄이기, 스마트폰 및 전자기기 사용 줄이기 등은 대부분 우리 생활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당장의 안위가 중요한 인간에게는 아직 닥치지 않은 재앙을 신경쓰는 것 보다 눈 앞의 불편을 견디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이렇다보니 국가 단위로 시선을 돌려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 각 국은 줄어드는 빙하와 올라가는 평균 기온에 위기 의식을 표명하면서 파리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들은 CE2050년까지 탄소배출량 제로를 실현하여 CE2100년까지 지구 평균 기온 상승폭을 섭씨 1.5도 이내로 막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는데요. 하지만 산업발전으로 여전히 탄소배출이 불가피한 개발도상국들과 선진국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적극적인 실현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각 국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친환경 행위의 범주가 다른것도 문제입니다. 여기에 세계 각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쟁은 여전합니다. 게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자본을 보유한 자산가와 기업들은 사람과 나아가 국가까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지속가능성, 인권이 우선되지 않습니다. 당면된 이득이 될 수 없으니까요. 아마 이대로 둔다면 인류는 수십년 후 북극과 남극의 빙하가 모두 녹아 지구 주요 섬들이 잠기는 장면을 직접 목격해야 심각성을 체감할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인건 그래도 우리가 재앙에 준하는 전지구적 사건을 얼마전 겪어냈다는 점입니다. 바로 ‘코로나-19 팬데믹’ 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CE2020년 1월 무렵 첫 보고되어 3월 11일 WHO에서 대유행을 선언하였습니다. 팬데믹 초기 세계 각국은 안팎으로 이동을 제한했고, 세계 경제는 급속도로 침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각 국의 과학자, 기업인, 정치인들은 다각도로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당초 1년 이상 걸릴 것이라던 초기 백신 개발을 팬데믹 선언 8개월 만에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2021년 부터 코로나-19의 영향은 차츰 줄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물리적 이동의 제약으로 인해 주요산업 등의 분야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한 원격 회의와 재택 근무시스템을 채택하였습니다. 학교 역시 인터넷을 이용한 원격 수업과 컨텐츠가 널리 쓰였습니다. 그러면서 전세계는 점차 안정을 찾았고 당초의 부정적 전망과 달리 전세계는 예전처럼 돌아갔습니다. 오히려 이시기 AI, 빅데이터 등의 IT 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했습니다. WHO는 CE2023년 5월 5일, 공식적으로 코로나-19 엔데믹을 선언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누적 감염자 약 7억 6천만명, 사망자 약 690만명 이라는 희생을 가져왔습니다. 이 아픔을 딛고 인류는 약 3년만에 괴상한바이러스를 극복해낸 것 입니다. 전지구적으로 인류에게 불어닥친 위기를 다함께 힘을 합쳐 이겨냈다는 경혐은 앞으로 불어닥칠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단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류의 위기 대처 역량에 대해 전문가들은 인류가 고도의 지적사고력을 바탕으로 한 소통과 협력을 바탕으로 전략과 기술을 만들어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역량을 초사회성(Ultra-sociality)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과거 수렵채집시기 조상들은 살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 도구를 만들고 서로 힘을 합쳐 다른 종들에 대항하고 대형 동물들을 잡아 먹었습니다. 이후 신석기시대로 접어들면서는 개,소,돼지,양 같은 중소형 동물들을 죽이지 않고 길들여 목축, 농사 등에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존중, 배려의 태도가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들 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이러한 능력은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에 적대감을 쌓고 크고 작은 폭력을 일삼게 만드는 것에도 일조했습니다. 공감능력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에 대해서 내가 특정한 감정을 갖고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공감능력은 때에 따라 어느 한쪽만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인종차별, 종교적 갈등 문제로 인한 배타성과 공격성의 발현은 대부분 공감의 형성이 내집단을 향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고결한 우리들을 이상한 무리들이 쳐들어 와 더럽히고 결국 우리를 못갈게 굴 것'이라는 혐오와 공포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앞에 불어닥칠 전지구적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열쇠는 인간이 지구 생태계를 위협하는 모든 것에 맞설 수 있는 보다 폭넓은 공감력과 상호협력을 선택할 수 있을지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심리학자 폴 블룸은 공감능력 자체에 너무 기대기보다 어려운 상태에 놓인 타자를 측은하게 여기는 연민(Sympathy)의 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인간의 공감은 서로를 존중하며 때에 따라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헌신하는 마음(Compassion)'에서 비롯되며 여기에서 사회적으로 타당한 법,제도가 탄생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울러 인지철학자 장대익은 인간이 갖고 있는 '공감의 반경'을 넓혀야 하며 이를 위해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가치, 덕목들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행동적 공감‘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이 많습니다. 여전히 각 나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고 있고, 개인들도 일단은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직도 세계 각지에서는 전쟁과 테러, 불특정 다수를 향한 혐오 범죄와 사이버 폭력 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과연 우리는 불편함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존중과 협력의 가치를 실천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게 잘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이 대답하기 어려운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고민을 한아름 안고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1. 장대익(2017), 울트라소셜, 휴머니스트. 참조

2. 장대익(2022), 공감의 반경, 바다출판사. 참조

3. 마사 누스바움(2019), 정치적 감정, 박용준 역, 글 항아리. 참조

4. 폴 블룸(2019), 공감의 배신, 이은진 역, 시공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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