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 이라는 이름의 뫼비우스의 띠.
일찍이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시민혁명을 경험한 프랑스, 영국, 미국, 그리고 아시아의 일본 등은 제국주의 식민지 전략을 노골화 했습니다. 이는 정치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합법적으로 보이게 지배하기 위해서는 매우 타당해 보이는 이론적 근거가 필요했습니다. 우생학¹이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이를 널리 이용해서 인종 간 생물학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이를 토대로 흑인과 같은 유색인종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 했습니다. 이는 자연스레 식민지 지역 사람들을 대하는 차별 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한 때는 폭압으로 부터 항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부터 시민혁명에 이르기까지 약 500여년 가까이 자유를 갈망하며 절실하게 투쟁했었습니다. 신의 존재 또는 왕의 결정에 대해서 약간의 의심만 가져도 탄압 받고 죽음에 몰렸던 그들은 신에게 속박 당하지 않는 자유를 얻자 그 힘을 다른 이들을 속박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의'한 제국주의 국가 세력에 맞서 식민지 치하에 놓였던 국가의 처절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저항은 결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끝내 그 결실을 이뤄내었습니다. 한편 CE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식민지로 전락했던 한국,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 국가들은 일본에 맞서 탄압 속에서도 끈질긴 투쟁을 지속하였고 CE1945년 8월 15일 마침내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습니다. 중남미 주요 국가들이 식민지배를 대략 200년~300년 가량 당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짧은 시간 내에 이뤄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 무렵 일어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분열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의 나치 정부가 독일에 들어서고 그들은 '아리아인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유색인종, 특히 유대인을 혐오하고 핍박하며 대량 살상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더 나아가 히틀러는 독일 순수 혈통 '아리아인'들의 제국 '게르마니아'를 세우고 세계 각 국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하며 동북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들을 식민지화 하고 서구 세력에 맞설 수 있는 일본 중심의 아시아 대제국 건설을 꿈꿨습니다. 그리고 극과 극은 통하는 법, 이 두나라그리고 또다른 독재자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는 동맹을 맺고 세계 정치의 중심축인 '추축국'으로써 자임하였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들을 다 빨아들여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추축국에 맞서 영국, 프랑스의 경계와 반발이 심화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CE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이틀 뒤 바로 선전포고를 합니다.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²의 서막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추축국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독일은 CE 1940년 4월 프랑스를 비롯한 베네룩스 3국 등 서부유럽 주요 국가들을 침공했고 이로인해 유일하게 연합국에는 영국만이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아시아에서는 CE 1937년 일어난 중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무서운 기세로 중국 대륙을 정복해 나갔습니다. 당시 국민당 장제스와 공산당 마오쩌둥의 연합세력(국공합작)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거칠 것이 없는 것 처럼 보였던 이들에게도 소련과 미국이라는 큰 벽이 있었습니다. 전쟁 초기, 이 두 나라는 공식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취하며 연합국 또는 추축국에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상당한 희생을 경험했기에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전쟁에 참전하기를 꺼려했고 영국 뒤에 숨어서 무기 등 군사적으로 지원만 했습니다. 소련의 경우 CE1939년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 동유럽 일부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전쟁에 참여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정세적 유리함을 깨뜨린 것은 독일과 일본, 그들 스스로 였습니다. 전세의 유리함 속에서 좀 더 빠른 승리를 원했던 독일군은 CE1942년 8월 21일에 소련을 침공했는데 소련군은 6개월 간의 공방 끝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독일은 이로 인해 큰 타격을 입고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CE1944년 6월 6일 개시된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프랑스를 빼앗겼고, CE1945년 1월 초 무렵 소련군은 독일 본토에 진입하면서 CE 1945년 5월 8일, 공식적으로 독일은 항복문서에 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일본은 CE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해군 기지를 폭격하였고, 이를 빌미로 참전한 미국은 CE1945년 8월 6일과 9일에 일본 본토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고, 이로 인해 일본은 CE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대한민국,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은 독립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닌 또다른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미국, 소련 등 연합국은 각자의 정치,경제적 이념에 따라 다시 분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 속에서 독일이 서독과 동독으로, 한반도가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한편 중국에서는 CE1950년 5월, 마오쩌둥의 공산당 세력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대륙을 장악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공산주의 세력은 한반도를 완전히 자신들의 손 안에 넣으려는 욕심을 드러냈고 이는 6.25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로인해 당시 남북한 인구 약 3천만명의 약 10%에 달하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국토의 1/3이 초토화 되었습니다.³ 6.25전쟁은 극단적 냉전 체제 경쟁이 낳은 비극의 산물로 오늘날 우리에게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을 이어지게 만든 결정적 원인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 체제 경쟁은 멈추지 않고 CE1960년대 초반 쿠바 미사일 위기와 미국의 베트남 침공, CE1970년대 후반 일어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으로 끝날줄 모르고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이 10년간 계속되면서 소련의 국력은 쇠락했고 경제적 어려움과 내부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CE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며 독일이 통일되면서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도 잃게 되면서 CE1991년 12월 소비에트연방, 소련은 해체되었습니다.
이렇게 냉전시대는 저물었고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특히 6.25 전쟁으로 거의 초토화되었던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빠른 고도성장을 거듭하며 CE1980년대에는 매년 6~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 약 30여년 간 이어진 군사 정부 체제에서도 벗어나 정치적으로도 본격적인 민주주의 체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이든 다 잘 될 것 같고, 다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이 시기, 하지만 그 끝엔 또 다른 야만적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1. 한겨레신문, [오철우의 과학풍경] '인종차별 거든 과학' 부끄러운 역사 고백, 2022. 10. 14. 일자,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61334.html 참조.
2. 정의길(2018), 지정학의 포로들: 세계의 패권 싸움은 지정학의 문제다, 한겨레출판. 참조.
3. 정명복(2023), 정전협정이 남긴 기록, 잊지 말아야 할 숫자, 전쟁기념관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정전 70주년 기획>편, https://www.warmemo.or.kr:8443/assets/webzine/202303/special2.html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