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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 Sep 06. 2024

Chater3.(6) 우리가 사는 세상

지역 간, 지역 내 힘의 균형이 무너지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인류의 역사는 문자 그대로 '투쟁의 산물' 입니다. 약 20만년 전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해내고 약 1만년 전 무렵 벼농사를 통해 안정적인 식량 자원을 확보하였고, 사람들은 한 곳에 정착하면서 도시와 국가를 만들어 문자, 법, 제도, 기술 등을 근간으로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어느새 인간은 명실상부 지구를 지배하는 종으로 거듭났습니다. 지구상에 인류라는 종(種)의 존망을 위협하는 존재는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가 되었지요. 그러나 이런 믿음은 인류에게 오만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CE1830년 프랑스 시민혁명 장면, (CC0 image, 위키 미디어커먼스)

'한번 마음 먹은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리고 어떻게든 해낸다.' 라는 인류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적 가치는 생-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순간을 돌파하는 원동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와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속한 집단을 굴복시키고 지배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개척에 상대적으로 먼저 눈을 뜬 건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의 각 나라들 이었습니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시민혁명을 거치며 경제적으로는 시장자본주의를, 정치적으로는 헌법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형태를 갖추며 강대국 반열에 이른 이들은 자신들의 힘을 보다 공고히, 그리고 영원히 지속하고 싶어했습니다.  이 시기  헤게모니 국가¹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각 국가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식민지화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거대한 파고를 동북아시아 3국 - 한국(조선), 중국(청나라), 일본(에도막부)에도 불어닥쳤습니다. 미국은 그들의 전쟁영웅 페리 제독의 증기선 4척을 앞세워 CE1853년 7월 일본 도쿄 부근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하면서 에도 막부 측에 미국과 수교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CE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하여 미국 선박의 입항과 및 미국 외교관에 대한 우호적인 대우 등을 하기로 했습니다. 더 나아가 CE1858년에는 에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무역 거래 실시, 일본 체류 미국인에 대한 미국 영사의 재판 관할권 부여 등을 담은 미일수호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영국은 CE1840년 제1차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를 굴복시킴으로써 난징조약을 맺어 홍콩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CE1856년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마침내 청나라는 이들에 항복하면서 CE1860년에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자주 국가로써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모습 (CC0 image, 위키미디어커먼스)


한편 이런 가운데에서 조선은 비교적 오랜 기간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 외세에 저항했습니다.² 흥선대원군을 위시한 위정척사파들은 성리학적 질서를 해하는 서학(가톨릭)을 배척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신해박해(CE1791), 신유박해(CE1801), 병인박해(CE1864) 등의 가톨릭 신자를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외세와의 교류 자체를 차단했습니다. 또한  왕권의 권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경복궁 중건(CE1867) 등을 추진하면서 무리하게 많은 노동력과 재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큰 불만을 낳았고 당시 동부승지였던 최익현은 상소문을 통해 흥선대원군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종이 최익현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실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그 어떤 외세도 함부로 기를 펴지 못하게 만들었던 흥선대원군이 사라진 상황, 일본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운효호를 앞세워 강화도 인근에서 함포 사격과 방화 등을 무력시위를 일으켰습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강화도조약(CE1876)이 체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요? 네, 앞서 살펴본 것 처럼 에도막부 시절 그들이 페리제독이 이끌던 '흑선 함대'에게 당했던 것과 같습니다.

CE1854년 8월 요코하마에 들어온 페리제독의 흑선함대 (CC0 image, 위키미디어커먼스)

그런데 일본은 어째서 청나라, 조선과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요?³ 분명히 일본의 에도막부도 조선만큼이나 엄격하게 쇄국정책을 적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몇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선은 외세에 매우 일관된 적대정책을 펼쳤지만 일본은 제한적으로 일부 국가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CE17세기에는 나가사키 부근에 데지마라는 인공섬을 설치하고 이 곳에 네덜란드 상단이 오가며 무역을 할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이를 발판으로 일본 내부에 유럽에서 발달한 각종 지식, 기술 등 이른바 '난학'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더 놀라운 것은 CE1853년에 미국의 페리제독의 함대가 쳐들어 올 것을 에도 막부에서 알고 있었고 이를 네덜란드 측에서 알려주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이를 알면서도 막을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부족했기에 항복을 해야했지만, 서양 세력들이 보유하고 있는 언어, 과학기술, 문화 전반에  대해 비교적 많은 정보들을 갖고 있었기에 이들은 이후 청나라, 조선과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막부의 우두머리인 쇼군 후계 구도에 불만을 느낀 일부 세력들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막부 봉건체제를 끝내고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과 더불어 신분제를 철폐하고 조세, 교육, 병역 등에 걸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이지유신(CE1868)입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유럽 및 미국의 각 나라와 같은 제국주의 노선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 사회, 경제적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대륙으로의 진출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는 조선과 청나라를 집어삼키려는 결정적 동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경쟁적 관점에서는 승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조선도 일본처럼 발전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쇄국정책을 택해서 식민지로 전락했다'며 한탄을 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이들은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화 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평가보다 앞서 짚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단일 종인 '인류(Mankind)'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선택을 한 것이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요? 중세를 지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인류는 각자만 더 행복하고 더 잘 살기 위해 골몰하며 이기심에 기반한 생존 욕구가 판을 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요? 무분별한 이기심이 공멸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1. 지오바니 아리기(Giovanni Arrighi)에 따르면 헤게모니란 정치, 경제, 사회 적으로 가장 큰 힘을 갖고 행사하는 강력한 힘을 뜻하며, 이를 지닌 국가를 헤게모니 국가라고 하였다. 아리기에 따르면 헤게모니 국가는 다른 경쟁자를 뛰어넘는 정보와 기술을 갖고 재화를 축적하고 유통함으로써 월등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시기별 헤게모니 국가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다. CE17세기: 네덜란드, CE18세기~ CE 19세기: 영국, CE20세기: 미국.   / 장기 20세기(2014), Giovanni Arrighi, 백승욱 역, 그린비. 참조 

2. 근대 조선과 일본 (2016), 조경달 저, 최덕수 역, 열린책들. 참조 

3.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2017), 신상목, 뿌리와이파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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