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집밥
“형님, 나라가 있어야 우리가 있는 겁니다. 거두절미하고, 이번에 독립군과 간도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운명을 전쟁이 될 것입니다. 형님처럼 골짜기 언덕 같은 곳에서 적의 공격을 방해하고 두렵게 할 총잡이가 필요합니다.”
“저도 대충 내용을 들었는데,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입니다. 상대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도련님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고향으로 돌아가시지요. 저는 가족을 지키겠습니다.”
범석은 그 말을 듣고 답답한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릴 때 형님 두 분의 용맹함을 보고 자랐고, 친형제는 아니지만 진심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근데 오늘··· 너무 실망스럽네요. 나라 등지고 천년만년 잘 사십쇼.”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로 인해 둘은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서로를 따뜻하게 품지 못했다. 예전과 너무 달라진 태석의 반응에 실망한 범석은 짜증을 내며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그때 마침 태석의 아내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늦은 시간이라 그냥 있는 거 빨리 내왔어요. 찬이 변변치 않아 죄송해요, 도련님.”
밥상에는 찬밥과 누룽지, 뭇국, 계란장조림과 후라이, 배추김치, 대파김치 정도가 있었다.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걸었고, 중간중간 동포분들이 먹을 걸 챙겨주긴 했지만, 이렇게 눈앞에 밥상이 차려진 걸 본 건 정말 몇 년 만이었다.
범석은 독립군에서 나름 장군의 위치에 있을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아직 스무 살 남짓의 한창 배고플 나이였다. 그리고 심지어, 어릴 때 자주 놀러 가 먹던, 잊지 못할 형수가 한 대파김치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범석의 배에서 나온 엄청 큰 꼬르륵 소리가 둘 사이의 정적을 깼다.
“도련님, 제 처의 성의를 봐서라도 몇 숟가락이라도 뜨시고 가시지요.”
그는 마지못해 문을 닫고 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고맙단 인사를 할 생각도 못하고 파김치부터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리고 바로 밥도 한 술 크게 떠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창피함이나 민망함 따위는 없었다. 그냥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고, 어릴 때 생각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젓가락질을 멈출 순 없었다.
“물이라도 좀 드세요. 체하시겠어요. 찬밥이라 푸석할 텐데···”
“감사합니다, 형수님. 너무 맛있어서 그만···”
형수가 따라준 물을 마시고 눈물을 훔치며 다시 계란후라이를 한입에 넣었다. 태석 역시 이 모습을 보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형원은 지금 일어나면 혼이 날까 봐 아까부터 자는 체를 하고 있었지만, 밥상이 들어오고 손님이 맛있게 드시는 소리와 음식 냄새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막 잠에서 깬 듯 부시시 일어났다.
“아··· 엄마··· 벌써 아침이야?”
“아니야, 아직 한밤중이야.”
“근데 저 분은 누구셔.”
범석이 놀라 밥숟가락을 놓고 형원을 바라보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안녕. 난 너희 아빠 동생이야. 너한테는 삼촌이지. 넌 형원이지?”
“네, 안녕하세요.”
“형원아, 어른에게 공손히 인사드려야지.”
아빠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범석 쪽으로 약간 다가가 다시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최형원입니다.”
“그래. 많이 컸구나.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다니 진짜 너무 기쁘구나.”
그는 형원과 악수를 하고 따뜻하게 안았다. 형원은 그때 왠지 모르게 막연한 뭉클함이 느껴졌다.
“배고프지? 이거 하나 먹을래?”
범석이 앞에 있는 감자를 하나 건넸다. 배가 고팠던 형원은 넙죽 인사를 하고 이를 받아 껍질째 바로 먹었다.
이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범석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시간에 너무 민폐가 많았습니다. 밥을 얻어먹으러 온 게 아닌데··· 순간 밥상을 보니 이성을 잃었네요.”
“도련님, 밤길이 위험하니 오늘은 자고 가시죠.”
“아닙니다. 빨리 돌아가서 제 자리를 지켜야죠.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문을 열고 나와 인사를 하는데, 형원의 엄마가 보따리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감자랑 고구마, 옥수수 좀 쪘어요. 다들 배고프실 텐데 가져가셔서 나눠드세요.”
“뭘 이런 것까지···”
범석은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뭔가를 다짐했다는 듯 쏟을 듯한 눈물을 꾹 참고 표정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형님, 이런 말씀 정말 치사하고 죄송하지만··· 형님 가족에게 자유를 주신··· 저희 아버지를 봐서라도···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형원아, 다음에 또 보자.”
태석은 멀어져 가는 범석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리에 누워서도 잠을 들 수가 없었다.
노비였던 자신과 형의 노비 문서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불태웠던 범석의 아버지. 그는 그날 자신의 집에 있던 모든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그에게 크게 감사하고 있다. 그 덕에 이렇게 가족을 꾸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난 가족을 지켜야 한다. 내가 없으면 이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다.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하면서 잠을 못 이루는 사이 아침 해는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백운평 계곡**
백두산 기슭의 이 계곡은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로 가득하다. 앞쪽은 폭포가 흐르고 있고 ‘ㄷ’ 자 모양의 이 계곡에서 독립군은 유리한 위치를 미리 점령하고 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여기가 제일 유리한 지형이긴 한데, 과연 이쪽으로 적이 올까요?”
걱정 가득한 범석이 대원들 모두가 걱정하고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부분이 모두의 걱정이긴 하네. 그런데 이 지형에 그렇게 익숙하지 않고, 그들도 먼 거리를 오느라 지쳤기 때문에 산기슭을 먼저 올라가서 내려오는 방식으로 추격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네.”
“곧 정보원들이 그들의 행군 사항을 알려줄 테니 만약 우리 예상과 다르다면 다시 위치와 작전을 변경하면 되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전투는 초반 기세가 중요한데, 딱 이곳으로만 들어온다면 지친 우리 독립군에 큰 활력을 줄 텐데···”
“나름 미끼들을 던져뒀으니 물기만을 기도해야죠.”
“그나저나 백야 장군님은 왜 오늘 하루 종일 안 보이시죠?”
“그러게요. 어제 별말씀이 없으셨는데··· 저만 장군님의 행방을 모르는 게 아니었군요.”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멀리서 조용히 속삭였다.
“장군님,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범석과 다른 장군들은 그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온몸에 땀과 흙이 범벅이 돼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백야 장군이 서 있었다. 그들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모두 장군 쪽으로 뛰어갔다.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나중소 (羅仲昭, 1866~1928)
고양 출신 무관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및 일본 육사 출신이다. 1910년 국권 피탈 후 망명해 북로군정서 조직에 참여,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1920년 청산리전투 당시 김좌진 장군을 도와 참모장으로 활약했으며, 이후 신민부에서 무장투쟁과 교육을 이어갔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