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따스한 설을 보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
"설날을 왜 지내는 지 아니?"
"새롭게 시작하게 위해서야"
설날 전 아이와 이 그림책을 읽고 설날의 풍경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 읽은 책. 김영진 작가의 설날이라는 그림책에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 저 문구가 참 인상적이라 아이에게도 질문을 해보았더니 돌아온 답변은 떡국을 가족들이랑 같이 나누어먹기 위해서란다
. 그럴듯한 답변에 나는 잠시 감탄을 하고야 만다. 그렇지, 설날은 흩어져있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한 데 모여 떡국을 함께 나눠먹으며 한바탕 웃음을 짓는 행복한 날이지 라고 아이의 따듯한 답변에 살을 붙여 우리 나름의 설날을 지내는 이유에 대해 고찰해보았더랬다.
그림책에는 설날을 맞아 가족들이 함께 대청소를 하고 차례상을 준비하고 차례를 지내는 일상적인 설날의 풍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이 그림책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림책 속 역할 분담이다. 음식은 엄마가 준비하고 청소와 설거지는 작은아버지와 그린이 아빠가 하는 합리적인 풍경에 절로 경탄이 나온다.
급변하는 사회 속 명절맞이가 많이 변했다해도 여전히 명절음식준비와 설거지는 당연히 며느리의 몫이라는 공식이 여전히 유효한 현실인데 그림책에선 너무도 당연히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참 편안하게 느껴졌다.
설날 그림책을 아이와 함께 읽다보니 유년시절 내가 맞았던 무수한 설의 풍경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5남매 중 첫째에다 장손인 아빠로 인해 당연직 장손며느리의 임무를 부여받은 엄마는 명절때면 손에 물마를 순간이 없었다. 명절 하루 전,우리 집 좁은 부엌에는 늘 밀가루가 수증기처럼 날아다녔고 25평 남짓한 온 집안 구석에 기름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삼남매인 우리는 자연스레 꼬지전과 명태전에 밀가루를 얇게 잘 바르는 방법을 터득했었다.
쟁반에 수북이 쌓인 밀가루 산에 꼬지전, 명태전과 동그랑땡 등에 하얗게 밀가루를 바르며 서로의 코에 밀가루를 묻혀가며 웃던 그 시절. 돌아보니 그 시절이 참 안온하고 포근했더랬다. 물론 우리 엄마에겐 가장 혹독하고 고된 순간으로 남았을테지만. 잠시 손을 거들다 각자의 위치로 사라져버리는 우리와는 달리 가스불 앞에서서 하염없이 서서 기름냄새를 공기처럼 흡입했던 엄마였기에. 유년 시절의 설 풍경을 떠올릴 때 명절연휴 끝 늘 엄마에게 파스를 붙여주던 기억도 덤처럼 따라붙는 걸 보면 그 당시 엄마의 명절노동은 상당했으리라.
명절음식을 준비하는 데는 수십여분, 먹는 덴 단 몇 초만에 끝나는 걸 보며 그 당시 어린 나는 한숨이 절로 쉬어졌던 것 같다. 옆에서 그 고됨을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테다. 누군가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 뒤엔 누군가의 살 부르틈과 허리통이 녹아져 있다는 사실을. 아이의 그림책을 보다가 갑자기 명절마다 부엌에서 한바탕 전쟁통을 치르던 그 시절의 엄마가 떠올라 마음이 뭉근해졌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던 엄마의 지난한 명절음식준비의 역사도 8년 전 유방암 투병 후 몸이 약해진 이후로 겨우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은 할머니댁에 가도 간단한 제사 음식은 사서 하는 편이고, 떡국 정도만 끓여먹으니 그 시절에 비하면 참 편해졌다고 엄마는 명절만 되면 내게 거듭 강조해 말한다. 그 말에 나는 더 이상 엄마가 파스를 붙이시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예전의 명절풍습이 엄마에겐 가혹한 무언가였음에도 불구 엄마는 그 힘든 시절을 반추할 때마다 눈빛에 아련함이 물드신다. 마트에 가면 식용유를 쳐다도 보기 싫다고 말했던 엄마는 어느새 마트에 즐비한 식용유를 보며 예전을 추억하신단다.
아마도 내 생각엔 시간이 지나서 힘든 노동의 기억은 소거되고 향긋한 순간만 남은 게 아닐까 한다. 가족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우리 삼남매가 전굽는 걸 도운답시고 옆에 옹기종기 붙어 밀가루를 묻히며 꺄르르 내던 웃음 소리를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전을 굽던 순간이 안온했다시며 입가에 작은 웃음을 그리신다. 그러고보묜 시간이란 참 마법같다. 그렇게 힘든 순간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둔갑시켜버리니까.
이번 명절은 임시공휴일 지정 덕분에 전에 없이 긴 연휴가 되었다. 얼마 전 제주여행에 가서 본 뉴스에선 설날 비행기표가 다 동이 났단다. 이제 명절이 되면 여행을 떠나는 것은 특이한 무언가가 아닌 당연한 사실이 되었다. 가족들이 한데 모여 제사를 지내고 떡국을 나눠먹는 풍경도 조금 희소한 것이 될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가족들이 모이면 서로의 입장만 내세우고 여전히 명절음식이나 정리에 대한 역할분담이 잘 안되다 보니 명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람들에게 만연해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다 명절의 풍경은 내 기억 속 추억으로만 자리하고 있고, 또 이렇게 그림책으로만 엿볼 수 있는 역사책의 한 페이지로만 자리할까 지레 겁도 난다.
세월이 흘러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도 명절이 반갑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물론 그 시절의 엄마처럼 고된 노동의 현장에서 파묻히는 가련한 신세가 되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의 의무감은 털어내지 못하는 먼지처럼 마음 속에 쌓여있으니까. 아이와 그림책을 보며 생각한다. 우리에게 가장 이상적인 명절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명절을 좀 더 따듯하게 보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김영진 작가의 그림책 설날과 아이의 답에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되도록이면 따스한 덕담을 건네고, 또 한 사람이 음식을 하면 다른 이는 정리나 설거지를 하며 역할분담을 하고, 으레껏 해왔으니 네가 해 가 아닌 이번에는 우리 모두 같이 하자 라는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설날을 보내면 어떨까? 김영진 작가의 말 처럼 설날을 지내는 이유는 새롭게 시작하게 위해서니까, 이번 설날은 조금 더 편안하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린 시절 우리 삼남매가 그러했듯이 함께 밀가루를 묻혀가며 함께 노동과 정을 나누는 특별한 명절을 보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여행도 물론 좋지만,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떡국을 나눠먹으며 서로의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쩌면 명절에만 허락된 특권이니까 말이다.(물론 떡국을 끓인 사람은 설거지에서는 해방시켜준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친정엄마가 그 고된 명절음식 준비에도 우리가 한데 모여 정을 나누던 따스한 풍경만 기분좋게 남겼듯이 명절의 가장 본질적인 목적은 바로 가족간의 화합과 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런 사실만 인지하고 따스한 명절 풍경을 이어가다보면 설날의 풍경을 역사의 뒤안길에 놓는 불상사는 없지 않을까?
이번 설날은 복잡한 제사음식과 차례준비에 크게 에너지를 쏟기보단, 그 에너지를 아껴 가족들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애정을 듬뿍 담은 눈빛으로 따스한 정서가 가득 흘러넘치는 모두에게 따스한 명절이 되기를 바래본다.
나도 이번 명절엔 다른 건 몰라도, 떡국만은 끓여먹으며 가족들에게 따스한 덕담도 고명처럼 올려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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