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진 영상 등은 찰나적이나마
네게 머물지 않기를

가시 없는 장미, 이젠 꽃피울 수 있기를.

by 헤르만

동생 보기를-.


청량하게 개인 파아란 하늘이 오늘은 유독 한국의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연상케 하는 날이다.

일본의 잦은 태풍과 텀텀한 회색의 공기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다 보니 오늘 같은 날씨는 정말 축복받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상쾌하게 개어있음에 감사한 마음마저 일게 한다. 월요일 오늘의 첫 수업은 체육실기. 피지칼 엑서사이즈라고 이른바 육상경기, 체육이나 수학을 내가 어느 정도 싫어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너이기에 아침 체육시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언니의 심정을 잘 헤아릴 걸로 본다.

20명 남짓의 일본 女子 아이들. 키는 전부 짜 맞춘 듯 158cm 정도. 유학생으로 오직 나만이 머리 한 뼘 정도 우뚝 커서 주뼛거리며 함께 동작을 맞춘다. 일목요연하게 발걸음을 맞춰 걷고 있는 오리 새끼의 우화에 나옴직한 못생기고 소외당하는, 백조(?)의 광경을 상상해 보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이들은 일단 어떤 단체라는 하나의 조직이 형성되면(아무리 소수라 할지라도) 무서울 정도로 거기에 합류해 자신을 지우기 시작한다. 日本이 ‘전체주의’라 불리는 이유를 각 개인의 행동 범위에서 적나라하게 깊숙이 스며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하나하나 튀기 시작하면 이미 그 조직은 단체로서 분해되기 시작해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이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되고, (자신의 기제에 의해서든 외부의 압박에 의해서든) 짓눌린 자아는 그것에 반발할 수밖에 없는 저항의 힘을 상대적으로 갖고 있기 마련이다. 이들의 이런 에너르기가 도가 지나칠 정도로 범람하는 성문화의 퇴폐적 풍속도라든가 기타 이상적(異常的) 인간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보는 것은 나의 견해이지만 나 자신 또한 이곳에 있는 이상 이들의 습관에 조금씩 동화되어질 수 박에 없는 사실에 씁쓰레할 따름이다.

그건 그렇고 너의 생활은 어떠니? 산뜻하게 말려 올라간 가을 하늘 아래서 캠퍼스는 한층 활기를 지어내고 있지는 않는지.

마음 맞는 친구들과 짝을 지어 환한 웃음기를 흘리며 캠퍼스의 동산을 걸어 내려오는 너의 모습을 언니는 그려본단다.

그럴 때의 언니는 언니도 모르게 싱그레 미소를 떠올리곤 한다.

언제까지고 이러한 너의 영상이 사랑스럽게 머물러 있었으면 하는 것이 언니의 바람이다. 집의 일로, 애태우며, 마음의 조리우는 구석지고 얼룩진 영상 등은 찰나적이나마 네게 머물지 말아야 한다.

그르든 셰프는 인간이란 혐오라든가 불안 등의 불필요한 감정으로 전 에너지의 대부분을 낭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작 실질적인 문제에 부딪혀 쓰일 에네르기(필자주:에너지)보다 쓸데없는 불안의 감정으로 소모시켜 버리는 에너지가 일쑤라고 말하고 있다.

언니는 네가 어떠한 역경이나 고통에 있어서는 생을 긍정적이고 따사로운 눈빛으로 깊게 볼 줄 아는 것을 믿고 있단다.

너의 그러한 가능성의 힘으로 언니도 몇 번이고 위안을 얻었고, 앞으로도 나아갈 것이다.

언니는 지금 예전 너도 한번 와본 적일 있는 도서관 3층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벽 한 면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직은 싱싱한 신록의 잎들을 자랑하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조금씩 퇴색해지기 시작할 숲들의 나무들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다.

언니는 만약 누군가가 일본에 와서 가장 편안하고 안정을 느꼈을 때가 언제인가를 묻는다면 단연 도서관 안에서 조용하게 인식의 세계를 향해 몰두하고 있었던 때라고 말하고 싶다. 인식을 향해 손 뻗치는 때의 교환되기 시작하는 농일한 대화, 눈앞에 펼쳐져 있는 어떠한 광대한 실체의 모습들도 가장 정밀하게 축소시켜 놓은 듯한 세계를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칠 때의 그 느낌. 단지 그 느낌 하나만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면....

편지 자주 쓸려고 마음은 먹으면서 언제나 이런 정도다.

낮, 저녁의 온도차가 많이 나는 요즘이다. 낮에 짧은 팔로 활보하더라도, 여분의 걸칠 수 있는 스웨터나 재킷을 가지고 다니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옷장 안에 있던 샛노오랑, 쇼킹핑크, 샛빨강 등의 무대복 등은 아직도 애용하고 있는지?(킬킬) 너의 어떤 곳에 그런 정열적인 구석이 숨어져 있는 거니? 信じられない。(믿을 수없음)

요즘 많이 절약하고 있다고 하던데, 좋은 습관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본다. 女子란 한번 치장하기 시작하면 ‘끝’이라는 것이 없기 마련이다. 언니도 요즘 실천하고 있는 中이다. 언제나 건강하고, 또 편지하마.


1993.9.27. 언제나 너를 생각하는 언니로부터...

P.S. 음대 언니의 편지 잘 받았다고 전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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