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상처를 주는 이유 2
첫째 아이는,
가끔 날 당황 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아주 아기였을 때부터 얌전했던 우리 첫째는,
장난감에도 낯을 가리는 아이였다.
장난감을 사줘도 몇 개월 동안 만지지도 않다가
‘자리만 차지하니 처분을 해야 하려나...’
할 때쯤 가지고 논다.
돌 지나고
이제 어느 정도 잘 걷기 시작할 무렵,
카페의 잔디밭에서 뛰어놀라고 내려놓은 적이 있었다.
너른 잔디 위를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닐 거란
내 바람과는 완전 정 반대로,
인상을 찡그리며 한 걸음도 걷지 못했다.
잔디의 푹신한 감각이 낯설었던 것이다.
놀이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모래가 너무 많거나, 벌레라도 붙어있거나,
바닥에 구멍이 송송 나 있는 놀이기구에 타게 되면
잔뜩 긴장한 채 얼어붙어
연신 도와달라며 엄마를 애타게 부른다.
5살인 지금에서야
바닷가의 모래밭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됐는데
그마저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겹게 겨우 발걸음을 옮기는 수준이다.
모래가 왜 무섭냐고 물으니
발이 밑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고 한다.
수영장에서도 물이 자신의 무릎 아래에 있어야
안심하며 재미있게 놀고,
겨울날 하늘에서 눈이 내려서
자신의 몸에 묻는 것도 싫어하며,
장갑에 눈이 묻을까 찝찝해 만지지도 못한다.
오랜만에 놀러 온 이모가 첫째를 꼭 안고
품 속에 두고 있었는데,
내려달라, 싫다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던 적도 있었다.
티셔츠를 입다가 조금만 얼굴을 가려도 난리가 나고,
음식을 항상 작게 잘라주는데도
고기의 힘줄이나 비계같은 부분이 씹혀
목에 잘 넘어가지 않으면
바로 못 먹겠다고 하고 뱉어내기도 한다.
어느날은 너무 답답해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으니
목에서 잘 안 넘어가면 목이 막혀 죽을 것 같단다.
죽음에 대한 공포, 불안.
우리 딸은 날 때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살았던 것이다.
죽음이 항상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은 삶이라니.
내가 이 아이를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라면,
태생적으로 불안 수준이 높게 타고나
매 순간 죽음을 걱정할 정도로 불안했던 거라면,
아이의 지난 행동들이 이해되지 못할 게 없었다.
이 아이의 불안은 어디서 왔을까?
나에게 이런 불안이 있었나?
남편에게 이런 불안이 있었나?
또 다른 의문점이었다.
어느 날 SNS에서 이런 글귀를 발견했다.
부정적인 사람은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이 글을 보자마자
부정의 대명사격인 남편이 생각났다.
내가 뭘 하자고 하면
굳이? 갑자기? 안될 것 같은데? 못할 것 같은데?를
달고 살던 남편.
부정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해 왔지,
걱정, 불안이 많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남편에게 확인해 보기로 했다.
직접적으로 남편에게 물어봤다.
“여보는 여보가 불안이 많은 편인 것 같아,
적은 편인 것 같아?”
내가 뭘 물어보면 항상 반대로만 말하는 남편이라
당연히 무슨 불안이냐며 큰소리 떵떵 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하는 말,
“굳이 따지자면.... 높은 쪽이겠지?”
남편의 그 말로 인해
그동안 딸의 행동과 남편의 행동이 오버랩되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편의 부정은 불안에서 온 것이었구나.
내가 싫어서 혹은
나를 열받게 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그동안 남편에게 품어왔던
많은 의문들이 이해가 되었다.
높은 불안 수준을 가진 남편.
그건 남편이 선택한 게 아니고
남편이 잘못한 게 아니다.
나는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은
이해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이후로,
남편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