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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좋아한다는 8살 아이들에게 동물에 대해 물으면 '강아지 사 올 거예요', '엄마가 고슴도치 사준댔는데 안 사줬어요', '하얀 고양이 사고 싶어요' 아직까지도 세상은 동물을 그저 물질대상으로 가르치는구나. 언제였던가, 반찬통보다 작은 종이상자에 햄스터 두 마리를 넣고 갖게 해달라고 조르던 아이와 상자에서 꺼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던 부모를 보았던 때가. 종이 가득 햄스터의 습성을 적어 떨리는 손으로 햄스터는 물건이 아니라고 전해주었을 때가. 그때의 수업에서는 막막함에 쓴웃음만 지었지만, 적어도 나와 함께 하는 아이들이 생명을 생명으로 여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기록으로부터 4년이 지났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났을지 모르겠다. 조금은 생각이 영글었을까? 오늘, 단톡방에 고양이 입양처를 찾는단 글이 올라왔다. 어디서 구조했냐고 물으니, 한 커뮤니티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새끼를 너무 많이 낳았습니다. 분양해 가실 분'이라는 글이 올라왔다고 한다. 눈을 질끈 감았다. 확실히 동물을 대상화하는 게 나이의 문제는 아니다. 분양이라는 단어가 참 저속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집을 분양받고, 고양이를 분양받는다. 아파트는 무생물이고, 거대하고, 거주 목적을 가지고 있고, 부동산이고, 고가에 거래되어 내가 얻을 수 없다. 고양이는 생물이고 작고 폭신하고 따뜻하고 저마다 성격이 다르고 식성도 다르고, 다만 사랑하는 사람만을 평생 바라보며 정순한 애정을 나누어준다. 이렇게까지 다른 두 단어에 같은 서술어가 붙다니말이 되지 않는다. 이제 조금 더 성장한 나의 학생들은 내 앞에서 '생명을 분양하다' 따위의 표현을 하지 않는다. 입양이라 하지. 그것 말고도 많은 말을 조심한다. 외모 평가를 하지 않는 일, 애인의 유무를 물을 때 성별을 지정하지 않은 일, 상처 주는 말을 하고 장난으로 치부하지 않기, 병신을 비롯한 혐오 단어를 (적어도 내 귀에 들어오도록) 하지 않기, 이런 작은 일들이 인간성을 이루고 지금보다 괜찮은 사회를 만든다. 나의 아이들이 진정으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정말 사랑의 힘을 믿으며 이타적이려 노력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흉내라도 내는 것이 다행이다. 위선이 모여 조금이라도 선한 사회를 만들고, 그 이후의 세대들은 또다시 더욱 민감하고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진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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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수업에서는 왜 어두운 것만 가르쳐요?"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이게 어두운 이야기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준 건 고작 책 몇 권, 영화 몇 편, 역사 조금, 사람들의 삶 조금일 뿐이다. 오히려 난 이것들이 너희의 생을 밝히고 세상을 밝힐 거라고 생각했다. 그늘 속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숨 쉬고 있고, 너희도 알았으면 한다. 나는 아직도 무지하다. 나보다 빨리 알게 된다면 너희는 더 빨리 세상을 밝힐 수 있지 않을까? 너희가 그늘 속에서 당차게 나아갈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라는 건 수업에서는 하지 못 한 대답. 음 다음번엔 좀 신나는 내용으로 수업을 구성해야겠다.
이것 또한 4년 전, 이제 나의 학생들은 '왜 어두운 것만 가르쳐요'라고 묻지 않는다. 다만 '왜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밖에 못했어요?'라는 질문을 듣는다. 다행이다. 너희가 정쟁, 독재, 전쟁, 차별, 탄압의 역사를 듣고 '왜 그랬냐'라고 반문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진정으로 기쁘다. '당대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말해준 뒤, 이제 너희 같은 사람들이 만들 사회가 분명 더 괜찮으리라 믿는다고 말을 얹는다. 아이들에게 부채나 얹어주는 어른이라 미안하다. 각자 이전 세대의 부채를 안고 살아간다.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말들은 내가 이전 세대에게 받은 아픔이자 상처이다. 상처 위에서 사랑을 피워내는 존재가 사람이다.
3
5학년 나경이에게 일주일간 뭐 하고 보냈냐고 물었더니 "인간이 되는 연습을 했어요" 한다. 그건 어떻게 하냐고 되묻자 "그냥 뒹굴 댕굴 하면 돼요"라고 무심히 답한다. 그래서 인간은 됐니? 했더니만 "반만 됐어요. 아침부터 뒹굴거리진 못했거든요" 하길래, 그럼 나머지 반은 뭐냐고 물어보니 대뜸 "사람이요. 반은 인간, 반은 사람"이란다. 천재인가? 나도 인간이 되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냥 뒹굴기만 하는 연습, 만약 실패했더라도 사람이니까 그렇지 뭐 하고 개의치 않는 연습. 아이들은 종종 너무 멋진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엮어서 책으로 내고 싶다.
나경이는 이제 중학생이 되었을 거다. 정말 당차고 똑똑하고 사려 깊은 16살이겠지? 나의 16살을 생각하면 나경이가 참 존경스럽다. 그제인가 어제인가, 동생이 '언니는 왜 인류를 사랑해?'라고 물었다. 그래서 '네가 있으니까'라고 했더니 그 대답을 제외하라 하였다. 세 가지로 답하라길래 '너처럼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인류에 포함되니까.', '앞으로 내가 사랑할 존재들이 포함되니까.', '마지막으로 인류는 언제나, 결국에는 사랑을 실현해 왔으니까 계속해서 온갖 고통 속에서도 그렇게 살아나갈 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라고 답하였다. 동생은 결국 다 같은 이유라며 김이 샜단 듯 고양이를 주물렀다. 고작 소시민에 불과한 내가 뭐 얼마나 거창한 이유로 사랑할 수 있나. 그냥 그렇게 괴로워하면서 사랑하면서 또 괴로워하면서 사랑하면서 모든 것에 일희일비하고 성장했다가 주춤했다가 상처받았다가 사랑받았다가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