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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준 Sep 18. 2024

#6 의자와 벤치에 관하여

2019 포르투갈 리스본

또 시장에 갔다. 약간 마음에 드는 것은 사지 않는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너무 많은 물건들 속에서 나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갈 물건들, 선물할 것들을 고르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나는 돌아가려면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다. 포르투로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동 비용도 솔찬해서 한 달이 좀 못 되는 시간 동안 리스본에만 콕 틀어 박힐 생각이다. 날씨가 내내 좋고, 테라스에서 마시는 커피가 그만이다. 간식으로는 두꺼운 초콜릿 아래 찐득한 카레멜이 발라져 있는 타르트를 먹었다. 아직 누구도 손대지 않은 원형의 큰 타르트에서 첫 조각을 받았다. 행운이 찾아올 것 같다.

또 컵 몇 개를 샀다. 나는 컵 중독자다. 잔이라고도 할 수 있고. 무엇을 담아 마실지, 누구에게 줄지, 어떤 시간과 대화를 나눌지, 컵을 만질 때의 손모양은 어떨지 같은 것들을 상상하는 것이 즐겁다. 산 컵들을 보면 나는 주로 푸른색 계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건으로 드러나는 내면의 색 같은 것이겠지.


아침부터 걷기만 하기 때문에, 허기가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며 가며 봐둔 피자집에 들어간다. 보통 식당들이 메뉴판을 밖에 놓아두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을 미리 고려할 수 있다. 피자들이 5유로 내외다. 적당하다. 점심시간도 지나서 식당 내부는 여유롭고 한가하다. 뉴욕에서 지낼 때도 피자를 좋아했었다. 큼지막한 한 조각을 들고 나와 볕 좋은 날 벤치나, 계단에 걸터앉아 한입 베어 물면, 행복감 같은 것이 밀려왔었다. 이 서민적인 음식(?)이 한국에는 제법 비싸게 들어와서 아쉽다. 어쨌든, 마음이 꽉 찰 정도 크기의 피자가 곧 나왔다. 입안 가득 피자를 베어 물고, 치즈와 토마토의 조화를 느껴본다. 1인 1 피자(?)

그 나라가 살만한 나라인지를 판단하는 내 기준은 부담 없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벤치가 얼마나 곳곳에 비치되어 있냐는 것이다. 이를테면 복지 같은 것. 여행길에 지쳐서 쉴 수 있는 곳, 고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앉을 수 있는 곳, 친구와 따뜻한 햇살 아래 혹은 시원한 그늘 아래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내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포르투갈, 리스본에는 의자들이 많다. 물론, 파도치듯이 이어지는 경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많다. 오래되어 보이는 의자들도. 여기는 아마 오래전부터 살기 괜찮은 곳이었겠지. 적어도 내 기준에 의한다면.

Y형이 내 소식이 궁금한가 보다. 나도 와인과 치즈, 음악과 자전거를 좋아하는 형 생각이 자주 난다. 포르투갈에 오기 전 우리는 거의 이, 삼일에 한 번 꼴로 만나서 술을 마시고 음악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산책을 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마음이 맞는 사람을, 존경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분명 축복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 형에게 사진을 보낸다. 오늘은 숙소 사진이 궁금하다길래 바로 사진을 찍어 보냈다. 30유로에 아파트 한 호를 빌렸다. 아침, 저녁은 보통 해 먹고 있다. 여행한다기보다는 사는 것에 가까운 형태인데, 내일이면 다시 숙소를 옮긴다. 물론, 알파마 지역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다음 숙소에서는 리스본 대성당이 코앞에 보일 것이다.

무분별하게 셔터를 누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핸드폰에 저장된 카메라 셔터 소리는 싫어한다. 좀 예민하다 싶을 정도로. 하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사진을 찍는다. 물론, 주변에 사람이 가까이 있지 않을 때. 사진은 필연적으로 과거를 담을 수밖에 없지만, 나의 일부가 그 속에 영원히 현재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이 사진의 매력일 것이다.

며칠 전 갔었던 식당에 또 갔다. 여전히 할아버지들과 어깨를 붙이고, 식사를 했다. 식사를 가져다주던 여자는 그때보다 더 바빠 보이고, 정신없어 보였다. 하지만, 재촉하는 사람이 없다. 언어들이 날카롭지 않고, 식당 안 소리의 흐름이 자연스럽다. 커졌다 작아졌다. 술이 들어가면 좀 커졌다가 사람이 바뀌면 다시 조용해진다. 한번 와봤다고 오늘은 메뉴판을 보지 않고, 오늘의 메뉴를 주문했다. 새끼 돼지 요리로 추측되는 음식이 나왔다. 오늘도 역시 식사를 포함해 식당이 주는 느낌이 부드럽고, 만족스러웠다. 옆 테이블에 앉은 할아버지는 나에게 윙크를 하면서, 오늘은 매니저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겠어하며, 멜론을 디저트로 시켜 먹었다. 그 할아버지의 미소에 내 마음은 멜론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고 향긋해진다. 나도 시간이 지나 그런 미소를 가질 수 있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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