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 수집은 끝났다, 이제는 방향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흡사 ‘자격증 사냥꾼’이나 ‘공부 중독자’처럼 살았다.
주말 반납하고 따낸 경영지도사 자격증(물론 코로나 영향도 있었지만), 남들 골프 칠 때 끙끙대며 다녔던 대학원, 그리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혀를 굴려가며 매달리고 있는 영어 공부까지
누가 보면 “김 팀장은 참 열정적이야, 자기계발의 화신이야”라고 추켜세웠지만,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그건 ‘열정’이 아니라 ‘공포'이자 '불안'이었다. 회사라는 울타리가 사라졌을 때, 알몸의 내가 세상에 내동댕이쳐질까 봐. 그때 덮고 잘 거적때기라도 마련해두자는 심정으로 이 악물고 스펙을 모은 것이다.
그런데 막상 배낭 안에 도구들(자격증, 학위, 어학)을 가득 채우고 나니, 정작 더 본질적인 질문이 뒤통수를 때린다.
“그래서 김씨, 배낭 싸서 어디로 갈 건데?”
무기는 잔뜩 챙겼는데, 싸워야 할 전장이 어디인지, 아니, 내가 싸우고 싶은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상황. 이 막막함은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깊은 허무함을 줬다. 뭐 허무함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할까, 싶었던 것 같다.
그간 읽었던 책에서 힌트를 얻고자 좀 정리를 해보자면,
1. 유시민이 묻는다,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에서 유시민 작가는, 인생의 의미는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덧붙인다.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
특히 일이 곧 놀이가 되고, 놀이가 일이 되는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밑줄을 그었다.
지난 20년, 나에게 일은 ‘놀이’였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아니, 일은 그저 월급을 받기 위한 ‘인내’였고,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일이 놀이가 되라니. 하지만 졸업 후의 삶도 ‘생계형 투쟁’의 연장선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돈이 조금 덜 되더라도, 내가 글을 쓸 때 느끼는 그 짜릿함,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코칭할 때 느끼는 그 묵직한 보람. 그것을 ‘업(業)’으로 삼는 것. 그게 유 작가가 말한 ‘놀이 같은 일’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진지하되, 심각해지지 않는 것? 뭐 대략 이런 방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놀듯 일한다는 것의 정의라
사랑은 역시, 연대를 통해서 발현이 되기도 하겠지만, 모든 것에는 사랑이 가장 중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도 하고, 성 어거스틴이 했던 말로 잘못 알려졌지만, 사실은 17세기 독일 루터교 신학자인 루페르투스 멜데니우스의 명언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In necessariis unitas, in dubiis libertas, in omnibus caritas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너무 멋진 말.
최근 관심을 갖고 여러 책을 읽게된 일본의 컨설턴트이자 작가인, 야무구치 슈는 뭐라고 했나,
2. 야마구치 슈가 찌른다, “쓸모있는 사람이 되지 마라”
일본의 지성 야마구치 슈는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와 그의 여러 저작을 통해 ‘도움이 되는(Useful) 사람’에서 ‘의미가 있는(Meaningful) 사람’으로의 전환을 역설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쓸모’를 강요한다. 편리한 가전제품처럼, 기능적인 보고서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는 해결책을 내놓는 사람을 원한다. 내가 지난 20년간 회사에서 인정받았던 것도 바로 이 ‘Useful’한 기능 덕분이었다.
다 아는 것처럼, 마치 뭐든지 해결 할 수 있을것 처럼, 그렇게 행동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하지만 야마구치 슈는 말한다. 문제 해결은 AI나 기술이 더 잘하는 시대가 온다. 이제 인간에게 필요한 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아니라, “무엇이 문제인가?”를 제기하는 능력, 즉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은퇴 준비조차 ‘Useful’해지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던 거다. 남들에게 잘 팔리는 컨설턴트, 기능적인 영어 구사자… 하지만 이제는 ‘김ㅇㅇ’이라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고유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기능이 아닌 ‘매력’과 ‘의미’로 승부하는 삶.
그게 우아한 졸업의 핵심 아닐까.
요것도 멋지네... ㅋ
3. 니체와 빅터 프랭클이 건네는 위로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방식의 삶도 견뎌낼 수 있다.”
니체의 이 말은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이어진다.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마지막 존엄은 ‘태도를 선택할 자유’에 있다고.
태도를 선택할 자유,
곱씹어봐도 겁나 멋진 말이다. 그것이 인간의 마지막 존엄이라니...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불안함은, 어쩌면 수용소 같은(좀 과한 비유지만) 회사 밖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공포다. 하지만 프랭클의 말처럼, 그 상황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쫓겨난 가장’이라는 비참한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 선장’이라는 주체적 태도를 선택할 것인가.
정리를 해보자면,
앞으로의 내 삶의 키워드 세 가지는,
의미와 재미, 그리고 자유?
불안은 여전히 내 배꼽 밑에 웅크리고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불안 때문에 대학원도 가고 자격증도 땄으니, 역설적이게도 그 불안이 나를 여기까지 성장시킨 동력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적어도 이제 그 불안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그만하면 된 것 같.. ㅎ
이제 도구는 그만 모으고 슬슬 움직여 봐야겠다, 이제 필요한 건 용기와 실행,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책 속에 없었다. 결국은 내일 부터 내가 내딛는 그 발자국 속에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