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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를 켜면 내가 들린다

잊고 있던 나를 만나는 밤

by EveningDriver

익숙한 장거리 배달을 갈 때면
가끔 라디오를 켜게 된다.
늘 내가 고른 노래만 듣던 일상 속에서
잠깐쯤, 남이 골라준 선곡이 반가워진다.
굳이 블루투스를 연결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버튼 하나로 틀어만 놓으면 되는 라디오.
광고와 사연, 멘트와 음악이 흘러나오면
어느새 나도 이 밤의 일부가 된 기분이다.

처음엔 밝고 경쾌한 방송을 찾았다.
아이돌 DJ가 진행하는 라디오처럼.
기분을 띄우기에 딱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꾸 손이 가는 채널은
결국 아저씨를 위한 방송이었다.

하나는 '배성재의 텐'.
저녁 10시부터 딱 한 시간.
스포츠 중계로만 알던 목소리가
이렇게 입담이 좋을 줄은 몰랐다.
‘감자과자 월드컵’, ‘과일 월드컵’ 같은
별것 아닌 주제로도 혼자 웃게 된다.
중간 광고 후 돌아올 때 나오는 음악은
데뷔초 듀스 느낌이 살짝 난다.
아저씨를 위한, 아저씨의 방송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딘딘의 뮤직하이'.
11시부터 1시까지.
사실 이분을 진행자로 만난다는 건
처음엔 조금 낯설고 의외였다.
예능에서의 철없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생각이 바뀌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이 단단하고
사연을 대하는 태도도 조심스럽다.
딘딘이라는 사람에 대해
내가 너무 얕게 알고 있었구나 싶었다.
역시, 그 자리에 있는 데엔 다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그래, 나 라디오 듣는 거 참 좋아했었지...'
나를 설레게 했던 노래들,
밤을 지새우며 듣던 목소리들,
그 시절의 내가 앉아 있던 작은 방의 공기까지 떠오른다.

돌아보니,
스무 살 무렵 그 밤의 여유와 위로는
회사와 일상, 결혼과 육아 속에서
조금씩 멀어졌던 것 같다.
특별히(?) 더해진 지금의 복잡한 상황을 벗어나
그 시절 나와 다시 마주한 기분.
잠시나마 반갑고, 편안했다.
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데에도 다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잠시,
시간을 거슬러 다녀오고 나면
어김없이 새로운 배달 수락 알림이 울린다.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다녀온 마음속 풍경을 뒤로 한 채
그렇게 이 밤, 이 거리로
조용히 나를 되돌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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