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규칙병

by 차안

아직도 너의 모습이 보여

아직도 너의 온기를 느껴

오늘도 난 너의 시간 안에 살았죠


길을 지나는 어떤 낯선 이의 모습 속에도

바람을 타고 쓸쓸히 춤추는 저 낙엽 위에도

뺨을 스치는 어느 저녁에 그 공기 속에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니가 있어 그래


가수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 노래 가사다. 예전에 멜로디가 너무 좋아 한참을 듣다가 가삿말을 곱씹고 나서는 듣지 않게 된 노래다. 길을 걸을 때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나의 하루에는 종일 네가 존재하는, 나와 너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가삿말.



강박증은 꽤나 생소한 병명일 것이다. 우울증처럼 이름에서 직관적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강박행동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규칙에 대한 병이라고 말하고 싶다. (강박사고는 나중에 따로 다루겠다.) 네가 만든 규칙을 벗어나면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이 몰려온다. 말 그대로 참을 수가 없다. 때로는 네가 속삭인다. 이 행동을 하지 않으면 가족을 해치겠다고.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 행동을 하고야 마는 병인 것이다. 나의 규칙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바닥의 선을 밟으며 걷는다. 마치 횡단보도 흰색 부분만 밟아야 한다고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에 찰 때까지 되돌아가서 밟고 다시 밟고, 밟는다. 선에 어떤 특정한 규칙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바닥을 보며 걷다가 네가 마음에 들어 하는 선, 배수구, 자국 등등 어떤 때는 가상의 선까지 머릿속으로 만들어 내서 발로 밟아주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숫자를 센다. 특히나 휴대폰을 볼 때 자막의 글자 수를 일일이 세서 더하거나, 운전할 때 앞 차의 번호판 숫자를 더한다. 학창 시절에는 각 분단의 사람 수를 세고, 더하고, 교과서의 글자를 셌다. 누군가는 숫자 한 번 세는 건 하고 나면 괜찮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눈에 보이면 계속 센다는 것이다.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반복해서 세고 또 센다.


3. 다시 하는 것도 병의 일부분이다. 손으로 여기저기 건드리면 짝수에 맞춰서 한 번 더 건드린다. 예를 들어 손으로 컵을 한 번 쳤다 하면 일부러 한 번 더 건드려서 두 번이 되게 만든다. 발도 그렇고, 눈길이 닿는 부분도 그렇다.


이렇듯 내 일상은 온통 네가 가득하다. 겉으로는 평범하게 흘러가지만, 그 속에 수많은 것들이 뒤엉켜있다. 내 에너지는 정해져 있는데, 고정적으로 너에게 나가는 몫을 빼고 나면 피곤하기만 하다.


어릴 적 다녔던 병원에서 받았던 책이 있다. 책 제목은 '살아있는 죽음 강박증'.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어떤 명예가 있어도, 자유롭지 않다면 그 삶이 풍요로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자유가 박탈된, 살아가지만 살아있지 않은 병이 강박증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keyword
이전 0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