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시대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어서 자존감이 높고 본인의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멋있다 여겨지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좋은 사람의 표본은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이'였다. 나는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는 전혀 아니었지만 순전히 폐 끼치기 싫어하고 싸우기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이자 회피형이었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대외적으로는 착한 사람이 되었다.
내 기준 착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기분 나쁠 만한 언행에 대해서도 모든 걸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넓기 때문에 기분 나쁨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한 기준이라면 나는 전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위에 말한 대로 평화주의자이자 회피형이었기 때문에 트러블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고 여겨져서 그냥 참고 지내왔을 뿐이었다.
결국 뜻하지 않게 그렇게 살아왔는데, 의외로 착한 사람으로 보일 때 장점은 별로 없다.
나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정말 성격이 이상한 줄 알았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나보고 성격 이상하다, 문제 다는 말을 툭하면 해댔으니까. 딱히 잘못을 하거나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지만 애교 없네, 싹싹하지 않네 등 다양한 이유를 들었었다. 물론 그때도 기분 나빴었지만 나는 싸우지 않고 속으로 삭여버리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반응이 없으니 막말인 줄 모르는 막말들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때도 그랬지만, 애교로 사람 무안 주는 짓은 제발 안 했으면 좋겠다. 난 애교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불쾌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학교에 와서 만난 친구들에게는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나를 나 자체로 인정해줬고 그런 점을 좋아해 줬다. 그렇게 지적을 듣고 살아왔지만 나는 알고 보니 밝고 긍정적이고 포용력이 넓고 덤덤한 사람이었을 뿐이다.
영화 '벌새'에는 90년대 K 소녀들이 엇비슷하게 자라왔구나 싶은 장면이 많은데, 그중 하나는 은희가 오빠에게 맞고 화내자 엄마가 쟤 성격 이상하다고 혼내는 장면이다. 은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나 성격 안 이상해' 악을 쓴다. 벌새를 보고 후기를 찾아봤을 때 그 장면에 공감하는 딸들이 많은 걸 보고 충격받았다. 미묘하고 섬세해서 나만 공감했지 보편적 공감대를 일으키는 장면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그 장면에 동조하는 후기들이 매우 많았다.
아무튼 이 생각은 직장생활을 하며 더 완연해졌는데, 약국을 그만둘 때마다 들었던 소리는 '약사님 곱게 자라와서 야단도 안 맞아보고 남들한테 싫은 소리도 안 들어보고 살았지? 여기도 못 버티면 어딜 가려고~ ' 였다. 도무지 근무할 수 없는 환경을 주었던 사람들이 했던 말이다.
남들한테 싫은 소리 안 들어보고 산 것은 내가 그만큼 내면을 달구며 조심히, 그리고 열심히 살아왔다는 방증인데 배려 없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그건 큰 내부 에너지가 필요하다. 싫어도 기분 안 나쁜 척, 쿨하게 넘어갈 수 있는 척을 하고 트러블 생기지 않게 중재하며 충동적으로 살지 않은 것. 모두 내가 진흙 바닥을 쿵쿵 다지며 쌓아온 것들이다.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노력한 게 아니라,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 그래 왔던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나에게 먼저 무례를 범한 건 그들인데, 나의 인내는 당연한 게 되어버리고 거기에 반발하는 건 충고 거리가 되는 것이다.
지금 직장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어리고 순해 보이는 여자 약사가 들어오니, 비웃고 가르치려들고 이것저것 태클 걸고, 업무 전반을 나에게 맡겨버리고 출근 2-3시간 늦게 해 버리는 것이다. 예전 같으면 참다가 그만둬버렸겠지만 이 번엔 한 명 한 명 조졌다. 이게 그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한 두 마디만 해도 상대가 더 놀라서 알아서 주춤하더라.
결론은, 착한 예스맨의 삶은 정글 같은 사회에선 좋은 타깃만 되는 것이다. 슬프지만 귀인을 만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이 그렇다. 싫은 건 싫다고 외치고, 싫다고 말했는데 너는 그런 내가 싫다면? 미련 없이 떠나면 되는 것이다. 친절하되 만만하지 않고 총명할 것. 아직도 연습 중인 쪼렙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