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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뎅뎅 Nov 26. 2022

시골에서 자란 개인주의자


 문유석 판사님의 책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정의하는 개인주의자는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도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안도감이 들 정도로 공감한 문장이다.


 나는 매우 좁은 커뮤니티의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 자랄 때는 그 세계가 전부였으므로 나와 맞지 않는 옷이 불편하면 내가 살이 찌고 빠지고의 문제이지 나와 딱 맞는 새 옷이 있으리라고는 모르고 자라왔다. 불편하고 스트레스받는 나날들 속에서 그다지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모든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고 나는 이번 생애와는 맞지 않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대학 입학과 동시에 서울에서 살며 알게 된 건 나의 성향이 그러한 문화와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나 자신을 파악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자아 성찰하는 타입은 아니라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고 사회활동을 하며 자연스레 보편적 타인과 나의 큰 차이점을 인지하게 됐는데, 나는 주변에 관심이 별로 없고 과도한 관심과 오지랖을 싫어하는 편이다. 나는 매일 보는 과동기가 10kg 이상을 빼도 인지하지 못한다. 어떤 옷을 입고 다니는지, 부모님이 뭘 하시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친구들은 내가 몸무게가 줄었는지 늘었는지, 화장을 어떻게 바꿨는지, 무슨 옷을 샀는지를 다 캐치하고 있었다.

 내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 때는 나와 관심사가 같고 감성이 비슷한 사람일 때지만 그게 아니라면 주변에는 매우 무심한 편임을 깨달았다. (다만 꽂히면 엄청 파고듦)


 내가 이렇게 타인에게 관심이 없으니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다는 자의식도 약한 편이다. 보통 '생각보다 사람들은 너에게 관심이 없어'라고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일상은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이고 난 이 부분을 소화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러한 특성은 세계 어느 집단에 가도 발현된다. 그러나 시골은 벤다이어그램의 전체집합이 더 커질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 차이점인데 그 특징을 열거하자면

 첫 번째로 어릴 적부터 수십 년을 함께 지내온 지인들이 지척에 있는 시골에서는 내 집, 네 집 경계가 희미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 우리 집엔 거의 매일 부모님의 친구들이 매일 밤 놀러 왔었다. 아무리 부모님 소유여도 함께 사는 건데 동의는 커녕, 시험기간이라 제발 자중해달라 부탁해도 아저씨들은 매일 밤 우리 집에 왔고 그건 시골 사회에선 이상할 게 없는 일상이었다. 매일 어른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불시에 들락날락하는 일상은 내가 집을 떠날 때까지도 적응되지 않았다.

 두 번째, 홀로 집중할 수 있는 문화가 부족한 사회에서 화젯거리는 늘 사람이다. 극도로 좁은 사회에서는 조그마한 이슈도 금세 흥밋거리가 되어 삽시간에 소문이 퍼진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팩트 그대로 보존되지도 않는다. 관심도 싫어하고 거기에 대해 나에게 왈가왈부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나는 그게 너무 스트레스였다. 입에 많이 오르내려지는 빈도와 정비례로 시기 질투하는 부류들도 많기 때문에 그다지 좋은 소리도 못 듣는다.

 세 번째, 나만의 탈출구가 없다.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게 현저히 적기도 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다. 그래도 지금은 카페도 많아지고 문화적 격차가 줄어들고 있지만, 내가 어릴 때에는 오롯이 혼자의 시간을 보낼 공간도 없었고 어디를 가도 아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되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창구가 부족했었다.


 나는 그래서 사실 좁은 커뮤니티로 돌아갈 수가 없다. 지금도 혼자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적어서 엄마 아빠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고,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엄청나다는 것도 안다. 그 기운이 상응하지 않은 건 약간의 비극이다. 나도 그런 관심을 즐기고 태연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나는 나의 세계도 중요하고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의를 지키게 더 좋은 사람이다. 본인의 궁금증보다 타인의 불편한 부분을 건들지 않는 게 더 가치 있다 생각하고, 사생활은 존중해줄 줄 아는 게 좋다. 나의 어릴 적 꿈 중 하나가 일기장을 훔쳐보지 않는 엄마였을 정도로 내면의 밀실을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고 또 그것을 지켜주는 게 기본 존중이라 생각했다.

 도시가 좋은 이유는 퇴근과 동시에 나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단 것이다.

뭐든 양날의 검이긴 하지만, 무심한 사회는 인정 없음과 동의어고 그 속에서 생기는 외로움과 고군분투해야 하는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51대 49의 비율이라도 나는 넓은 세계의 삶이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모순되는 것은, 나의 개인주의자 성향의 기저에는 시골의 정에서 비롯되는 단단한 사랑과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타인이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언제든 내가 다치면 더 맞서서 돌을 던져주고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으로 품어주는 고향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세상을 살며 소멸되지 않아야겠다 다잡고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비빌 언덕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를 불행하고도 안정적으로 키운 그 사회는 고맙고도 불편하고, 좋아하지만 아쉽게도 나와 온도가 맞지 않은 환경이었다고 정의하면 될 것 같다.

 나는 앞으로도 그 세계와 완전히 친해지는 건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 모순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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