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C.S(7)

해군사관후보생

by 글짓는 베짱이

7장. 명예주[사전적 의미: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


1주일간의 지옥주는 우리에게 '먹는다''잠자다'의 본능적인 생리 활동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인가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 준 길고 지난한 시간이었다. 마치 산소의 중요성을 모르고 숨 쉬며 사는 인간들에게 그 숨을 강제로 빼앗을 경우 벌어질 끔찍한 상태를 경험했다고나 할까?!


군대 시계는 오늘도 고장 난 듯 술 취한 듯 쳐다보면 움직이다, 방심하면 멈추거나 비틀거리며 시간을 연장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결국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간다'는 명언처럼 지옥주가 끝나가고 있었다.


"명예!"

해군사관후보생 훈련에서 처음으로 품위존엄이 담긴 첫 경례구호였다. '복종'과 '단결', '지옥'을 지나 6주 차에 접어들면서 이제 좀 장교다운 면모를 뽐내는 단어로 경례를 하자니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체력이 이렇게나 좋았나 싶을 정도로 강건해지고 온몸의 근육들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가며 웬만한 구보나 훈련에도 끄떡하지 않는 자신을 느낄 때면, 낯선 나를 대면하는 것 같아 어색했지만 이렇게 또 다른 내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명예 주가 끝 나갈 때 즈음 우리의 체력은 상상 이상으로 강인해져가고 있었고, 그 점을 테스트라도 하겠다는 듯 전통 훈련인 '기수 구보'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N.O.C.S 90기였던 우리에게 대운동장 트랙을 구보로 90바퀴 도는 가혹한 훈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기수 구보 당일 훈련관들의 표정에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흘렀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체력장 시험에서 오래 달리기 종목이 있었는데 거의 꼴찌에 가까운 경험을 했었던 나는 운동장 90바퀴를 도는 기수 구보가 너무나 걱정되는 훈련이었다. 가볍게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는 전투복과 철모, 개인 소총을 무장하고 해군사관학교 운동장에 집결했다. 운동장 한편에는 소방차 한대와 앰뷸런스 차량이 서있었고, 운동장을 마주 보는 계단에는 선배 장교들 수십 명이 응원차 앉아있었다.

생소한 풍경에 막 이겨내려던 긴장감이 배꼽을 타고 올라와 심장을 때리는 바람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반면에 머리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가장 강하고 멋있는 해군 장교가 된다!"


선임 훈련관 호각소리에 맞추어 구보가 시작되었고 평소 체력훈련으로 받았던 구보보다 몇 배가 될 길고 긴 구보 행렬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운동장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앞에 계단에서 응원하던 선배 장교들이 좋아라 손뼉 치며 남은 바퀴수를 큰소리로 알려주고 있었다. "89바퀴~" "88바퀴~"...."72바퀴~"...

"차라리 돈 바퀴수를 불러 줄 것이지... 아직도 72바퀴나 남은 거야?! 젠장~"


그때쯤이었다. 땅바닥이 잡아끌던 군화의 무게감과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소총이 가슴팍에 안겨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때를 쓰며 매달리는 상황이 너무 버겁게 느껴지고 '헉헉' 대는 숨소리조차 쇳소리로 변해가고 있었던 그 순간이었다.


두발이 땅바닥에서 공중부양처럼 떠올라 마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듯 가볍고 경쾌해졌으며, 그렇게 고통스럽게 내뱉던 들숨과 날숨이 뭉게구름 위를 산책하듯 부드러워졌다. 계단에 서서 웃고 손뼉 치는 선배 장교들의 모습이 슬로 모션이 되었고 주변의 모든 잡소리가 사라지고 평온한 정적의 상태가 되었다.

[마라톤에서 '러너스 하이' (30분 이상 뛰었을 때 밀려오는 행복감.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의식 상태나 행복감) ]


"65바퀴~힘내라 힘~"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정적을 깨는 비수 같은 선배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전신을 후려쳤다. 가볍고 경쾌했던 두 다리가 갑자기 쌀자루를 매고 뛰는 양 무거워지면서 어느새 목에서는 쇳소리와 함께 들숨 날숨이 정신없이 교차하다 순서도 바뀔 정도로 숨 가쁜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기수 구보 중 다리에 쥐가 난 동기를 돕고 있는 장면]

차츰 다리에 쥐가 나서 쓰러지는 동기들이 생기고 총을 떨어뜨리거나 구역질을 하며 주저앉는 동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화창한 하늘에서 시원한 물방울이 떨어졌는데 대기하던 소방차에서 탈진을 막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내가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아직 절반도 돌지 않았는데 그만 주저 않고 싶은 내적 갈등으로 머리까지 복잡했다. 그때 내 바로 앞에서 뛰던 동기가 비틀거리더니 자신의 소총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나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떨어진 총을 들고 그 동기를 옆에서 지지해주며 뛰고 있었다. 조금 전 갈등은 간데없고 새로운 에너지가 충전되는 듯 온몸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20221027_214313.jpg [기수 구보 중 이탈한 동기를 돕는 장면]

'동기애'...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몇 주간의 고된 훈련 속에서 서로를 위하고 의지하는 동기애라는 감정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 힘이 오히려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그 에너지가 또다시 동기들에게 전달되어 거의 종점을 향해 달려 나가는 원천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10바퀴~ 잘한다 후배들~ 힘내라 힘~!" 선배 장교들의 응원 휘파람과 박수소리가 그 무엇보다 따뜻하고 기분 좋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또다시 구름 위를 걷는듯한 행복감과 함께, 저녁노을이 내려앉은 고즈넉한 사방의 풍경들을 감상하는 여행객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변신하였다.

익어가는 석양 위로 그리운 어머니 얼굴이 그려지고 무뚝뚝하신 아버지가 웃으시며, 항상 내 곁에 있어주었던 친구 녀석이 씩~ 미소 짓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바퀴~~ 파이팅~~!!"

계단에서 우리를 응원하던 선배 장교들이 모두 기립하여 손뼉을 치고 주먹을 불끈 쥐어가며 환희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선명한 흑백 사진처럼 '찰칵' 뇌리에 박히면서, 난 단잠에서 깬 듯 다시 현실로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곳은 군홧발로 수놓는 리드미컬한 음악소리와 훈련관들의 마지막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 그리고 동기들의 거친 숨소리가 한데 섞여있는 웅장한 오페라하우스의 무대 중앙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한 바퀴를 돌아 저 멀리 훈련관들이 소총을 일렬로 잡고 서있는 피니쉬 라인이 보이자 우리 동기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바닥부터 올라오는 감동의 함성을 아니,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와~~~ 와~~~~" 맞은편에 서있는 악당들을 적으로 생각하고 무찔러 들어가는 전투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악당들(훈련관)이 너무나 반갑고 고맙게 느껴졌다.

훈련관들은 피니쉬 라인에서 멈추지 못하고 달려드는 성난 황소를 길들이듯 "워~워~ 워~ 워~" 해가며 구보 행렬의 관성의 힘에 밀려 운동장 끝까지 군화를 질질 끌면서도 우리를 멈춰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모두들 난사된 총알에 맞고 쓰러지듯 운동장 잔디밭에 널브러졌고, 누워서 바라다보이는 검붉은 하늘은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돌며 우리에게 축하한다는 환희의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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