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에세이 열일곱 번째 이야기 – 버티는 줄 알았는데, 나아가고 있었다
25m 수영장을 기준으로 어떤 영법이든 두 바퀴, 즉 100m를 돌고 나면 한번 쉬고 싶은 유혹이 밀려온다. 그걸 떨치고 또 두어 바퀴 돌면 한없이 내가 기특해지면서 한 번은 쉴 자격이 주어지는 느낌마저 든다. 강사님도 어떤 수영 회원도 쉬는 것을 제지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쉬엄쉬엄, 하지만 부단히 따라붙으려 애쓰며 강습에 참여했다. 하여, 10바퀴를 돌라고 해도 실제론 7~8바퀴를 돌았다. 서러워도 슬퍼도, 이 건 그냥 생활체육이야, 수영선수 할 것도 아닌데 너무 욕심내지 마, 스스로 토닥이며 경비대처럼 벽을 지키고 잠시 쉬지만 내 앞을 스쳐 가는 회원들 면면과 마주치다 보면 왠지 모를 민망함이 올라온다. 그래도 어쩌랴, 숨찬데. 숨차 죽을 것 같은데.
남들은 수력에 비례해 호흡, 발차기, 체력이 늘어나는데, 그렇지 않은 나를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초급반을 함께 했던 상급반 회원들이 간혹 위로와 훈수를 뒀다. “원래 실력이 계단처럼 상승한다, 확 느는 시기가 온다.”, “나도 처음엔 똑같은 생각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호흡이 트였어요.”, “쉬고 싶을 때, 한 바퀴 더 돌면서 밀어붙이면 실력이 늘어요.” 등등. 일리 있는 말들이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보다 열 살, 스무 살 많은 분도 수영복만 입으면 마치 슈퍼맨 망토를 걸친 것처럼 물속을 쉼 없이 날아다니는데, 나는 여전히 뺑뺑이가 버거웠다.
그러던 지난주 핀데이, 강사님이 다양한 수업 진행 후에 남은 시간 동안 원하는 영법으로 15바퀴 돌라는 특명을 내렸다. 키다리 아저씨 같은 오리발을 장착해서인지 괜한 오기가 일었다. 쉬지 않고 돌아볼까? 6바퀴 이후로 끊임없이 고비가 찾아왔다. 이번에 쉴까, 다음에 쉬자, 한 바퀴만 더 돌고 쉴까, 열 바퀴만 채우고 쉬자, 머릿속 소리 없는 전쟁은 꽤 격렬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탄 물고기처럼 자동으로 벽을 치고 돌아서기를 15번, 어느새 유혹을 떨치고 전쟁의 승자가 되어있었다. 도파민이 터졌다. 금메달을 따고 기쁨에 몸부림치는 수영선수처럼 온몸으로 속 쾌재를 불렀다. 공중부양이라도 하는 듯한 들뜸이 수영장 밖을 나와서도 이어졌다. 과한 쾌를 그나마 눌러준 건, 오리발이라는 호위무사를 대동했다는 사실이었다. 과연 오리발을 끼지 않고도 돌 수 있을까?
핀데이 다음날은 여지없이 현 실력의 민낯이 드러난다. 수영 속도는 느려지고, 지치는 속도는 빨라진다. 착각 속에서 헤매는 나에게 찬물을 끼얹는 날. 처음으로 쉬지 않고 뺑뺑이 열다섯 바퀴를 돈 다음 날도 새삼스레 오리발의 위대함을 곱씹으며 강습내용을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었다. 마지막 십여 분을 남겨두고 강사님은 자유형 열 바퀴를 주문했다. 어제 터진 도파민이 곳곳에 남아있었지만, 기대는 할 수 없었다. 오리발 없이 쉬지 않고 열 바퀴 도는 일은 내 인생에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고, 늙음을 빙자해 신포도 같은 합리화 성역에 가둬놓았기 때문에. 마음을 비우고 돌았다.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돌 때마다 파아란 벽은 사과를 먹어보라는 뱀처럼 끊임없이 쉬었다 가라고 유혹했다. 여섯 바퀴 돌 때는 그 유혹에 넘어가려는 듯 다리가 주춤했다. 강사님이 팔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직립보행이 이루어질 위기였다. 하지만 다행히 고비를 넘기고 ‘일곱 바퀴, 여덟 바퀴, 아홉 바퀴, 라스트’를 들었다. 드디어, 자유형 10바퀴를 돌았다. 오리발도 없이. ‘우와! 나도 이게 되는구나.’ 모두 물속에 있었지만, 나는 구름 위에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승자로 구름 위에서도 방방 뛰고 있었다.
강습과 개인레슨을 병행하면서, 건강 목적으로 하는 생활체육이니 욕심내지 말자 다독이면서, 툭하면 쳐들어오는 수태기와 다투느라 쓸데없이 수영 장비를 사들이면서, 실력이 늘어나길 손꼽아 기다렸나 보다. 이렇게 뿌듯해하는 걸 보니.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주워 들었던 성공의 레시피 같은 말들이 튀어나왔다. ‘하면 된다, 꾸준한 게 중요하다, 습관이 인생이다, 버티는 놈이 이기는 놈이다…’ 소소한 수확으로 명언에 의미를 펌프질 해댔다. 더불어 단순히 내가 버티기만 한 것이 아님을,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늘 조바심이 화근이다. 조바심이 성실성을 갉아먹고, 섣부르게 백기를 들게 한다. 그렇게 접은 일들을 꼽자면 손가락이 모자란다. 극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꾸준히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을 줄 알면, 분명 변화가 찾아오는데. 이젠 ‘반복의 권능’을 믿고, 하루하루를 메꿔가야겠다는 다짐도 인다. 자유형 10바퀴가 어쩌다 이룬 사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겐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준 사건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