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에세이 스물여섯 번째 이야기 – 수영가방처럼 수태기를 들고
수태기는 수영 권태기를 줄인 말이다. 길지 않은 수영인 삶에도 수태기가 몇 번 왔었다. 주 6일 수영하면, 식사나 양치처럼 당연한 루틴으로 정착될 만도 한데, 간혹 뒷짐을 지고 뒤로 물러나, 진자운동처럼 이쪽 벽에서 저쪽 벽으로 저쪽 벽에서 이쪽 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 느닷없이 들이치는 지루함에 버거워한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 새벽에 일어나도 수영을 갈까 말까 고민하게 되고, 수영이 마치 TV나 음악도 없이 러닝머신 타러 가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망설임의 턱만 넘으면 어떻게든 50분이 채워지고, 오늘도 새벽 수영을 마쳤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데, 수태기 동안은 망설임의 연속이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늘지 않는 실력 탓이다. 가볍게 뺑뺑이를 도는 듯한 다른 사람들 꽁무니를 쫓으며 가랑이가 수십 번 찢어지다 보면, 흥미가 시들시들해지다 여지없이 수태기에 쏙 들어가고 만다. 그 핑계로 수영복 지름신이 강림하고, 수경과 수모 쇼핑에 착수하면 일시적인 봉합이 가능해진다. 허나, 그건 그야말로 ‘일시적’이다. 수태기가 길어지면 수친들에게도 ‘수태기 타령’을 불러대고, 지인들에게도 ‘수영을 계속할까? 말까?’하는 무의미한 질문을 반복한다. 수영이 일상의 유일한 낙이라고 떠들고 다닌 게 무색해지게.
그런데도 꾸역꾸역 수영을 가는 건, 하고 싶을 때만 하자는 여유를 부렸다가 아예 안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에 수영하다 그만둔 것이 못내 아쉬웠고, 이대로 그만뒀다가 십여 년 후에 또 똑같은 아쉬움을 토로할 것이 예상되기에. 몸을 끌어다 수영장에 던져놓으면 자의든 타의든 부지런히 물을 저으니, 일단 일어나면 망설이기 전에 잽싸게 차에 시동을 건다. 물론 ‘나’에 대한 예의는 아니다. 고충을 무시하는 강압적 행태다. 그래도 강압에 힘입어 아직까지 수태기로 수영을 쉬거나 그만두지 않았다.
수영한 후, 불면에 시달리지 않고 감기도 걸리지 않은 걸 보면, 건강해진 건 분명하다. 아마 수영에 대한 장점과 단점을 늘어놓으면, 장점이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도 분명하다. 그래도 건강하고 몸에 좋은 것이 늘 달콤한 건 아니니까, 아무리 훌륭한 명분도 권태를 이기긴 쉽지 않으니까, 수태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말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 비단 수영뿐이랴. 내 일상에 들어앉은 숱한 루틴에 권태가 들러붙지 않는 게 무엇이 있으랴. 항상 새롭고 설레게 하는 게 과연 무엇이 있으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몇 번 먹으면 이내 물리고 마는데. 진자운동처럼 수영장 벽과 벽을 왔다 갔다 하듯이, 매일매일 하는, 혹은 아주 가끔 하는 일마저 불쑥불쑥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때가 온다.
그럴 때면 환경을 바꿔보라는 조언도 날아들고, 여유 있게 쉬어가라고 토닥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냥 하기로 했다. 묵묵히. 많은 방법을 강구해도 일시적이고, 잠시 회피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돌아오면 문제는 덩그러니 그대로임을 발견하기 일쑤였기에. 죽을 만큼 힘들거나 괴롭지 않다면, 그냥 하던 대로 하기로. 머리를 비우고 가기로.
그래서 이젠 수태기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수영 센터를 넘보거나 수영복 신상에 눈독 들이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이번 주 자유 수영은 가지 말까 하는 망설임은 애교로 눈감아준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수태기가 오면, 매달 찾아오는 월경처럼, 또 왔구나 하며 별스럽지 않게 받아들인다. 늘 들고 다니는 수영가방처럼 수태기를 든 채, 묵묵히 차에 시동을 걸고 진자운동처럼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 장시간 넘어지다 찾아낸, 수태기 극복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