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2)
11화에 이어서 진행되는 내용입니다!
이런 의문이 있을 겁니다. ‘자유를 제한 없이 보장하라는 말인가? 그러기에는 폐단이 많지 않은가? 자유에 한계가 있을 진데, 그 한계를 어떻게 정하면 되는가?’ 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행위는 비판 여론에 의해 통제될 수 있거나, 더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사회 전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는 그 정도까지 제한되어야 합니다. (중략) 하지만 개인이 타인과 관련된 일로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니라 자신에게 관련된 일에서 자신의 취향과 판단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면, 각자 의견을 자유롭게 가지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자신의 의견을 실행에 옮기고 그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는 자유도 제약 없이 허용되어야 합니다.
개인의 ‘취향과 판단’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이 아니라면 ‘실행에 옮기고 그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있는 자유’를 ‘제약 없이 허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취향과 판단이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들에게 해를’ 끼친다면, ‘반드시 통제’해야 합니다. 이때 통제는 법적 처벌일 수도, 여론의 도덕적 비난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악성 댓글을 다는 행위는 자유가 아닙니다. 악성 댓글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주변 사람과 절연하고 잠적하거나, 심각하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행동도 자유가 아닙니다. 가짜 뉴스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집단적 광기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헌법 제37조 ②항’에서도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자유의 한계를 둡니다. 사회 안녕을 헤치는 자유는 ‘법률로써 제한’하는 것이죠. 요컨대 자유의 한계는 타인을 침해했는지 여부입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말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밀의 원리에 따르면 그저 놔둬야만 할 것 같지만, 밀은 고개를 가로 흔듭니다.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다면, 인간사 각자의 행동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서로의 선행이나 안녕을 외면해야 한다는, 그런 이기적인 무관심 중 하나로 이 원리를 여기는 것은 아주 큰 오해입니다. 관심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의 이익을 위해 사심 없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중략) 인간은 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도록 서로 돕고, 더 좋은 것을 선택하되 더 나쁜 것을 피하도록 서로 격려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간은 더 뛰어난 능력이 발휘되도록, 어리석기보다는 현명하며 저급하기보다는 고귀한 목적과 사색을 향해 그들의 감정과 목표가 더 많이 지향되도록 서로를 계속해서 자극해야 합니다.
밀은 타인을 향한 ‘이기적인 무관심’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요구하죠. 서로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충고나 조언하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 ‘더 좋은 것을 선택하되 더 나쁜 것을 피하도록 서로 격려할 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올바름’은 주관적인 영역입니다. 자칫 내 충고가 타인에게 강요가 될 수 있죠. 그래서 밀은 토론을 강조했습니다. 내가 근거를 들어 ‘올바름’을 요구하면, 상대방은 이를 개방적으로 수용 후 검토합니다. 검토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은 재반박하겠죠. 재반박은 다시 같은 과정을 거치고, 이는 결론에 이를 때까지 반복됩니다. 결론에 도달했을 때, 이를 따를지는 상대방에게 달려 있습니다. 최종 선택에 개입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단지, 나는 설득의 과정을 열심히 밟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면 됩니다. 이 설득의 과정이 밀이 말한 타인을 향한 관심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자유론>을 정리해볼까요? 어떤 생각도 다 존중받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다수라는 이유로 개인을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내 생각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제한받습니다. 타인에게 무관심하란 말은 아닙니다. 내가 생각한 ‘올바름’이 맞다면, 토론의 장에서 열심히 상대를 설득해야 합니다. 그것이 타인을 향한 관심이니까요. 그렇다고 선택에 개입하면 안 되겠지요.
가까운 사람이 제 말을 따르길 바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타인의 선택을 간섭하는 제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지요. 관심과 걱정이라는 합리화를 하면서요. <자유론>은 이 욕망에 제동을 겁니다. 네가 틀렸을 수도 있다고 겸손을 요구합니다. 상대가 나와 같아지길 바라지 말라고 청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저와 같은 반성을 하고 있나요? 누구라도 자유로운 사회를 추구합니다. 자유로운 사회의 첫걸음은 개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마음을 담아 안도현 시인의 <간격>으로 긴 글을 줄입니다.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 때는 몰랐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어깨와 어깨를 대고
숲을 이루는 줄 알았다
나무와 나무 사이
넓거나 좁은 간격이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벌어질 대로 최대한 벌어진,
한데 붙으면 도저히 안되는,
기어이 떨어져 서 있어야 하는
나무와 나무 사이
그 간격과 간격이 모여
울울창창 숲을 이룬다는 것을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숲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았다
13화는 '여섯 번째 책갈피 : 케네스 쿠키어·빅토어 마이어 쇤버거·프랑시스 베리쿠르의 <프레임의 힘>'으로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