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1)
사회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은 의견을 모으고, 이를 통해 형성된 것이 바로 ‘여론’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은 강력한 의사 표현입니다. 위정자가 여론을 거스르는 정책을 펼친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질타를 당합니다. 사람을 모아 시위하고, 국민청원으로 뜻을 모읍니다. 언론에 투고하고, 위정자를 상대로 집단소송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거 때 투표로 국민 다수 의견을 드러내지요. 여론은 국민의 뜻대로 국가를 운영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여론이 언제나 정의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다수의 의견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질 때, 오히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다수의 폭정’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려한 사람이 바로 ‘다섯 번째 책갈피 , <자유론>’ 저자 ‘존 스튜어트 밀’입니다.
오늘날 여론의 향방을 보면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계산된 의도가 담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반 사람들은 지능뿐 아니라 취향도 무던합니다. 색다른 것을 하고 싶을 만큼 강렬한 욕구나 취향이 없다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강렬한 욕구나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칠고 무절제한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며 멸시합니다. 이런 일반적인 실태에 덧붙여, 도덕 향상을 내건 강력한 운동이 시작된다면, 우리 예상은 뻔하지요. 오늘날 그런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행동을 정형화시키고, 과도한 행동을 자제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판단을 모방(8화 <설득의 심리학 1> ‘사회적 증거 원칙’ 참고)합니다. 만약 그 판단이 다수의 판단이라면, 더 신뢰하지요. 다수의 의견과 내 의견이 같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수와 다른 생각, 신념, 주장은 ‘별나다.’라고 삿대질 받으며, 사회로부터 소외될 위험이 큽니다. 소외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다수 의견에 맞춥니다. ‘뚜렷한 개성’은 사라지고, 모두가 비슷해집니다. 이것이 밀이 <자유론>에서 비판했던 ‘다수의 폭정’입니다. <자유론>을 함께 읽으며, 밀이 왜 다수의 폭정을 경계하며 사상의 자유를 강조했는지 알아볼까요?
밀은 세 가지 상황을 가정하여 사상의 자유를 보호해야 할 근거를 설명하는데요.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습니다.
표가 제시한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다수가 틀렸고, 소수가 옳은 상황입니다. 이 경우, 사상의 자유가 지켜지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소수의 진실은 묻힐 수 있습니다. 한때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돌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았고, 인간이 인간을 사고팔았습니다. 오랜 시간 다수가 당연히 여긴 생각이죠. 이를 거스르는 자를 박해하고, 필요하다면 전쟁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밀은 이 경우를 인류가 ‘오류를 진실로 바꿀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라 표현합니다.
둘째, 다수 의견이 옳고, 소수 의견이 틀린 상황입니다. 이 경우는 문제가 없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밀은 이 상황에서도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자기 의견에 대한 충분하고 대담한 토론이 자주 이뤄지지 않는다면, 비록 사회통념이 진실이라도, 살아있는 진실이 아니라 죽은 독단으로 간주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중략) 이런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참된 의견은 머릿속에 있고, 논쟁은 편견에 지나지 않으며, 논쟁과는 독립된 믿음이 있고, 여전히 증거가 있다고 가정하면서―은 이성적 존재가 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진리를 설명하는 말에 우연히 달라붙은 한 개의 미신에 불과합니다.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고민하지 않고 다수 의견에 편승한다면, 비록 그것이 ‘진실이라도, 살아있는 진실이 아니라 죽은 독단’(맹목적 믿음)에 불과합니다. 밀이 말하는 ‘이성적 존재가 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토론’입니다. 토론은 한쪽의 오류를 드러내고, 다른 쪽의 진실을 밝힙니다. 다수에 속한 사람은 이성적 방식(=토론)으로 맹목이 아닌 확신을 가집니다. 제 주장을 합리적 근거로 뒷받침하고, 상대의 논박을 적절히 방어했기 때문이죠. 사상의 자유를 기초로 하는 토론이 없었더라면, 다수가 소수의 ‘오류와 충돌하면서 얻어지는 대단히 이로운 기회’인, 진실을 더 명확히 볼 기회를 잃게 됐을 겁니다.
셋째, 다수 의견, 소수 의견 모두 진실의 일부를 지니고 있는 상황입니다.
전체가 진실인 경우는 거의 혹은 전혀 없습니다. 때에 따라 진실을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담고 있을 뿐입니다. (중략) 다수 의견이 올바른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조차도 진실의 일부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사회통념이 배제한 진실의 일정 부분을 포함하는 모든 의견은, 설령 그 진실 속에 오류나 모호함이 아무리 많이 뒤섞여 있을지라도, 소중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닙니다. 어떤 생각이라도 어느 정도의 오류를 가집니다. 역으로 말하면, 어떤 생각이라도 어느 정도의 진실을 가집니다. 만약 한 의견이 다른 의견의 숨통을 조인다면, 그 의견 속 진실을 체험할 기회를 잃습니다. 자유롭게 토론하며 오류를 수정하고, 진실을 공유하는 것이 인류에게 더 이롭지 않을까요? ‘그 진실 속에 오류나 모호함이 아무리 많이 뒤섞여 있을지라도, 소중하게 고려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상의 자유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사상도 다수의 이름으로 핍박받아서 안 됩니다. 어떤 의견이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어느 의견이든지 어느 정도 진실을 내포합니다. 내 주장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주장도 소중합니다. 다행히 사상의 자유는 우리나라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인데요. 이 헌법 조항을 인용하며 한 꼭지 끝맺겠습니다.
헌법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 (개념) 헌법 제19조에서 말하는 양심이란, 인간의 윤리적·도덕적 내심 영역의 문제이다. 헌법이 보호하려는 양심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이지,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양심이 아님. (헌재 1997. 3.27. 선고, 96헌가11)
- (내용) 양심의 자유에는 널리 사물의 시시비비나 선악과 같은 윤리적 판단에 국가가 개입해서는 아니되는 내심적 자유는 물론 이와 같은 윤리적 판단을 국가권력에 의하여 외부에 표명하도록 강제받지 아니할 자유까지 포괄함. (헌재 1998.7.16. 선고, 96헌바35)
12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