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정신 바짝 차려야 했던 이집트와 고요하고 느긋했던 베를린의 추억
2005년 갔었던 베를린 국제 영화제가 55회였는데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당시 임권택 감독 특별전을 해서 괜히 뿌듯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한데 그게 벌써 18년 전이라니… 2004년 12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반년 간의 배낭여행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이었다. 원래는 2월 베를린, 5월 칸, 9월 베니스 국제 영화제를 모두 가볼 계획이었으나 5월 말에 체력과 돈이 모두 떨어지는 바람에 귀국하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1주일 정도 여행하고 영화제 개막인 2월 10일에 베를린에 맞춰 도착할 계획이었지만 다합에서 만나 이집트 여행을 함께 한 친구가 게스트도 아닌데 무슨 개막식에 맞춰 가냐며 자기랑 1주일 더 이집트 여행 더 하고 폐막 전에만 가라고 권해서 주저앉아 19일에 베를린에 가게 되었다. 별다른 준비 없이 이집트에 왔던 나와 달리 중동 여행 4개월 후 마지막 목적지인 이집트 여행을 마치고 귀국할 예정이었던 그 친구는 이집트 여행 계획을 충실히 준비해서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알렉산드리아나 덴데라 신전은 갈 생각도 못했으리라.
쿨하고 배울 게 많아서 이집트 여행을 풍요롭게 했던 스물세 살의 대학생이 벌써 40대가 되었다니 이 또한 믿어지지 않는다. 헤어지기 전에 받아둔 18년 전 메모를 카톡으로 보내주니 자기가 썼던 글을 보고 빵 터졌다. 이집트에서 2주 동안 같이 여행한 게 전부였는데 이렇게 오래 지속될지 그때는 미처 몰랐던 우리는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고 만나면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참 알 수 없는 것 같다.
무질서와 혼돈의 도시 카이로를 떠나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 기억난다. 정말 대조적인 공간에 하루 만에 도착하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그 고요함이라니… 내 귀에 이상이 생긴 건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이 도시의 고요함은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는 극장가에서도 느낄 수 있었는데 부산 국제 영화제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익숙한 내게 이곳에서 무려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고요한 분위기였다.
독일에 도착했을 때 다시 혼자 여행을 다니게 되니 허전했는데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며칠 동안 영화를 보면서 심심함을 달랬던 기억이 난다. 현장 티켓 오픈을 하지 않았던 칸 영화제에 비해 베를린은 그냥 현장에서 티켓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 줄을 설 필요조차 없이 보고 싶은 영화는 대부분 볼 수 있었고, 레드 카펫에서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루도 별일 없이 지나간 적 없었던 이집트와 그냥 조용하게 즐길 수 있었던 베를린의 추억 속으로 잠시 빠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