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사람은 아니더라.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깨달았지만 가장 결정타를 얻어맞은 일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만나 30대 중반까지 알고 지낸 오랜 친구가 있었다. 싱가포르 생활 초창기, 그곳에서 자리 잡고 살고 있는 그 친구 때문에 든든했고, 알바 자리도 소개해줘서 고맙게 생각했었는데 얘가 나를 친구로 생각하긴 했나 싶은 일이 있었다. 설문조사 건당 13달러(싱가포르 달러)를 주는 일이라고 소개받은 알바를 3주 정도 하고 모두 마치는 날, 같이 일했던 동료와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건당 30달러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Thirteen dollars? No, Thirty dollars!”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 정신을 차린 후 담당자를 통해 친구가 소개비 명목으로 17달러씩을 챙겼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소개비를 챙긴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쳐도 내게 한마디 말도 없이 내가 일한 비용보다 소개비를 더 받아간 것은 2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한테 할 수 있는 행동인가 의심스러웠고,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멍청해 보였나 싶어 자괴감이 들다가 근본적으로 나를 친구로 생각하긴 했나 싶었다.
어처구니없고 화가 났지만, 그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따져서 그가 챙긴 소개비를 돌려받고 싶지도 않았고, 어떻게 네가 이럴 수가 있느냐 식의 화풀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에게 나는 친구가 아니었다는 확실한 상황을 알게 되었는데 굳이 얼굴 붉히고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비를 가린다고 해서 그가 나에게 사과하고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면 애초에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텐데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둘이 공통으로 알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고, 작은 교민사회에서 괜한 불미스러운 험담이 퍼지면서 전선이 확대되는 것도 싫었다.
그냥 상종하지 않아야 할 상대는 조용히 관계를 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그에게 일언반구(一言半句) 없이 연락을 끊었고, 나는 나대로 살았다. 싱가포르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 친구 한 명이었지만, 모르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아는 사람은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철저하게 그를 외면하고 살았고, 직장과 집을 구하면서 그에 대한 서운함도 희미해졌다. 싱가포르가 워낙 작은 도시라 가끔 번화가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간단한 안부를 묻고 그냥 지나쳤다.
시시비비를 따지더라도 상대가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인지 파악부터 하는 게 인간관계의 지론이고 가까이 지냈던 세월이 아까워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보다 앞으로의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니 아닌 사람은 아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