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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Nov 17. 2022

시네마

 


 허백련이 농업기술고등학교를 설립할 것이라는 말이 돌던 당시, 나는 일기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다 검고 얇은 수첩 속에 하루 일과가 새겨지고, 칸 속에서 흘러가는 하루가 빼곡하다 한약방집 딸과 함께 거닐던 아치형의 교각을 그려 넣거나, 교토에서 건너왔다던 목회자가 알려 준 노랫말을 옮겨 적기도 했다     


 교육자들은 자꾸만 미래를 강조하지만 나는 과거를 계속 뒤돌아보게 된다 금지된 시간을 적극적으로 열람하는 후손이 된다 간혹가다 조상의 말들을 베껴 적는 새벽에는 맨손으로 흙을 파내어 묘를 옮기는 심정이었으며, 한번 새겨졌다 파헤쳐진 말들은 무덤가의 흙처럼 축축했으며……      


 이제 우리 집 담벼락 너머로 허백련의 학교가 완공되어 가는 것이 보인다 감초와 삼을 곱게 싸매던 손이 내게 꼭 쥐어지는 미래가 보인다 아내는 양산을 챙겨 들고 나는 구두를 꼼꼼히 닦아 신는다 부부는 한여름의 땅을 밟는다 부부는 아스팔트의 물성을 최초로 감지하며 극장으로 간다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에, 누군가의 망막에는 시네마가 맺힌다 물구나무를 선 이야기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손뼉을 치다가 세월이 간다 마침내 시간은 주렁주렁 열리는 몸을 얻는다 앞뒤로, 자유자재로 흐른다 먼지 구덩이 위에서 마음껏 뒹군다 인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인간이 무늬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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