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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안 Nov 18. 2022

볼니와 윤영

1

헬무트 볼니 씨는 1944년 8월 2일 새벽 다섯 시, 독일령 슐레지엔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태어난 ‘브레슬라우’가 공업 도시였다는 사실을 강조해 말하곤 했다. 볼니 씨가 태어날 당시에는 나라 전체를 먹여 살릴 정도로 중요한 도시였다는 거였다. 그것은 그의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짓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자신이 폴란드의 브로츠와프가 아니라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 동쪽 지방 억양이 드러나도록 굴림에 힘을 주는 그의 독일어 문장, 집안 곳곳에 걸린 1900년대 중반 고향의 모습을 찍은 흑백 사진들과 노란색과 파란색이 대치하듯 배열된 슐레지엔 주의 깃발. 그것들은 볼니 씨에게 자신의 근본을 알려주는 표징 같은 것이었다.

  윤영을 처음 만났던 몇 년 전에도 그는 낯선 이십 대 아시아인인 윤영에게 자신이 나고 자란 그곳을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자신만의 의식을 지켰을 것이다. 지금은 폴란드 땅이 되어버린 슐레지엔이라는 곳을 아느냐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그곳의 토양을 거름 삼아 자라지는 못했다고. 그럼에도 프로이센의 꽃과 철이라고 이름 지어진 그곳을 죽는 날까지 기억할 거라고.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잊지 않게 만드는 절체절명의 행위라고. 윤영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윤영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그의 첫 모습은··· 지나칠 정도로 한국의 전쟁 역사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그의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생 직후 벌어진 일을, 그는 마치 엊그제 보고 들은 듯 큰 목소리와 점점 굵게 패는 주름과 급한 손짓으로 표현해 내곤 했다. 죽어 가는 시체들, 널브러진 빵 쪼가리 위로 뛰어다니는 쥐떼들. 그 당시 한국은 사정이 어땠는지 그는 윤영에게 여러 번 물었다. 물론 그 시절 한국에 대해 윤영은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국사책에서 봤던 6.25 전쟁을, 마치 직접 겪어 본 역사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윤영은 볼니 씨만큼 역사적인 사람도 아니니까.

  사실 윤영에게 한국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수준의 독일어 실력이 없었다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7년 전의 윤영은 ‘고객님, 조식 시간이 끝났습니다.’라든지 ‘오늘 자몽 주스가 좀 많이 남았네요.’라든지,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같은, 유치원생들도 알아들을 정도의 독일어만 할 줄 알면 생활에 불편함이 없었으니, 역사와 문화를 논하는 독일어란 윤영을 피로하게 만들기만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때 윤영은 볼니 씨의 말을 그가 원하는 수준으로 알아들었을 리가 없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어쩌면 의사소통의 본질적 속성에 기인한 건지도, 그러니까 완전한 소통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인 탓인지도 모른다. 볼니 씨가 모국어뿐 아니라 동유럽의 외국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한들, 그가 언어에 천부적 능력을 갖췄다 한들, 윤영이 쓰는 언어를 단 하나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둘은 어차피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끊임없이 자기 논리를 이야기해야 하는 발화자였고 그건 둘 간의 반복적이고 무차별적인 오해를 의미하는 일이었다.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언어라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 시점에 윤영은 그런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회의였으며 감정적 방패이자 자존심이었다. 물론 그런 생각은 한국으로 돌아가 모국어만 구사하며 살았던 몇 년 사이 모르는 새 희미해져 버렸다. 

  그런데 윤영이 독일로 생활의 터전을 아주 바꾸기로 결심한 지금의 시점에 볼니 씨는 다시 그때의 기억을 되돌려 놓으며, 어째서 윤영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묻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 자신의 뿌리를 스스로 놓아 버리는 이 미련한 짓을 하게 되었는지. 

  그것은 윤영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었다. 윤영은 이미 한국에서의 취업 활동을 그만두고, 서울의 전셋집에서 보증금을 빼 독일에 정착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한국에서 살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아 보겠다고, 자본주의의 논리에 휘말리지 않고 나의 길을 찾아가 보겠다고, 완전히 새롭고 낯선 일을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았고 한국 사람들은 많지만 그렇다고 정착하기 쉽다는 뜻도 아닌 데다 별다른 로망도 없는 북미보다 유럽의 어느 곳이면 이주를 마음먹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곳이 유럽의 어느 장소여야 한다면 구체적으로는 당연히 독일이어야 했다. 볼니 씨와 그의 부인 헤나와 윤영보다 대여섯 살쯤 많은 그들의 아들이 있는, 그러니까 이미 여섯 달이나 홈스테이를 하며 익숙해진 바로 그 집.

  그래서, 글쎄.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한국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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