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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윤영은 볼니 씨의 집 이층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방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몇 시인지도, 며칠인지도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외부의 자극이 멈춰 버린 기이한 느낌. 윤영은 눈을 뜨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다만 파동처럼 밀려드는 것들을 몸으로 체득하듯 받아들였다. 호오의 경계를 벗어난 것 같은 느낌, 경계의 언저리에 주저앉아도 좋을 것 같은 느낌, 세상에 발 닿지 않은 것 같은 낯설고 온유한 감각. 그것은 분명히 한국에서 사는 내내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희망도 절망도 요구하지 않는, 무기력마저 마음을 가볍게 하는 그런 감정, 감정이 없는 감정.
시차 적응에 실패해 두 번이나 깨어났던 윤영은 스마트폰이 알려주는 로밍 시간을 확인하고는 드디어 아침이 되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침대 위 어둠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팔을 뻗어 블라인드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철제 블라인드가 드르륵거리며 서서히 빛을 방 안쪽으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부연 빛이 천천히 차오르며 밤의 먼지들이 공중에서 미세하게 부유했다. 고요하게 방을 채우는 먼지들을 보며 안정을 실감한 적이 있었나. 기껏해야 먼지에 감동하고 있다니. 몇 달 전만 해도 아무 쓸 데가 없었던 스물여덟의 무직자 윤영이 이런 쓸모의 감각을 얻어도 괜찮다니.
이대로라면,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욕망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숨을 붙인 채. 무엇을 욕망하라고 다그치는 세상에서 벗어나서. 그냥 살고 싶은 대로.
두 달 전 헤어진 도운은 말하곤 했다. 네 힘든 이야기를 들어줄 힘이 나에게도 없어. 둘 사이에 굳건히 존재한다고 믿었던 신뢰와 4년의 세월은, 그 말과 함께 햇볕에 바짝 마른 낡은 종이 귀퉁이처럼 바스러지고야 말았다. 속을 좀 썩긴 했어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게 하지도 않았고, 아주 가끔이었지만 서류 작업이 전부인 일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다만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건물을 팔아 돈을 벌다 아주 중개업자가 되어버린 윤영의 오빠는 밤낮으로 집값에 관한 조언을, 윤영이 현실에 얼마나 무지한지에 대한 충고에 곁들여하곤 했다. 윤영은 제 몫을 잘 챙기고 사는 주변의 사람들도 점차 견딜 수 없어지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할 줄 알면 그렇게 넋 놓고 두고 보고 있을 수는 없을 거라는 오빠의 말과, 힘들다고 하지만 너 스스로 옥죄는 것일 뿐이라는 도운의 말은 윤영을 세상에서 멀리멀리 밀어냈다.
윤영은 몸도 마음도 지쳐 너덜거리고 있었지만 스스로 그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한민국 어딘가 쉴 공간 하나 있으면 괜찮을 거라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탓이었다. 이 도발과 멈춤이 언제까지 갈지, 어디까지 갈지, 윤영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때의 경험은 지금 윤영의 숨을 쉬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 탈출이었다는 사실을 반증시켜 주고 있었다.
창밖 하늘로 흩어지는 구름을 바라보다가 윤영은 오래된 가구들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헤나가 일어날 시간이 넘었는데. 볼니 씨의 가족은 오랜 비행에 지쳤을 윤영이 잠을 깨지 않도록 모두 신경 써 조용하는 걸지도 몰랐다. 밖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따라 윤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볼니 씨의 집에서 나가기 전까지, 그러니까 여기에 머무는 것이 허락되는 날까지 사용할 물건을 좀 구해 와야지. 윤영은 생각했다.
7년 전 윤영이 여섯 달을 살았던 볼니 씨의 이 집은 이층짜리 주택이었다. 이층 집이긴 했는데, 아래층과 위층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볼니 씨는 아래층에 그의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고 위층은 아들 다니엘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들은 윤영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윤영은 그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줘야 하나. 나는 자유를 찾고 싶어 독일에 왔다. 독일에도 썩 나은 종류의 자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곳이라면 적어도 한국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면서 당신들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이 집에서 나가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볼니 씨에게 이미 말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오게 되어 참으로 미안하다. 독일에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곤 당신네 가족뿐이었다··· 아니, 독일에 당신들이 있어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모른다. 당신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뉴질랜드나 호주, 아니면 캐나다 어딘가에 있었을지 모르겠다. 평생 당신들과 연락을 끊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에 우리의 인연은 생각보다 길었나 보다···.
문을 열었을 때 집안은 어둠과 정적뿐이었다. 침실에서 번져 나오는 희미한 빛을 따라 윤영은 천천히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집은 변한 게 없었다. 복도 왼쪽에는 욕조와 샤워 부스가 있는 욕실이 있었고 그 옆에는 변기만 있는 작은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복도 끝에는 다니엘이 썼던 조금 더 큰 침실이 있다. 복도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현관문이 있는 통로로 들어갈 수 있고, 통로 반대편에는 주방이 있었다. 통로 오른쪽 문을 열면 큰 침실을 두 개 정도 이어 붙인 크기의 거실이 나오는데, 지금은 암막 블라인드가 쳐져 보이지 않지만, 창 너머 멀리 전나무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검은 숲이라고 이름 붙여진 산맥이 보일 것이 분명했다. 익숙한 것들로 둘러싸인 어둠이, 오래되어 묻은 냄새의 흔적이, 2년마다 전셋집을 바꿔 가며 이사를 해 왔던 윤영에게는 도리어 새로움이었다. 완전히 안착된 것들이 만들어 내는 낯섦 같은 것이었다.
윤영은 블라인드를 올려 볼 생각을 거둔 채 가벼운 티셔츠와 끝이 닳은 검은 면바지로 갈아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1층과 맞닿은 정원으로 나가 뚜렷한 방향 없이 걸었다. 세월 탓인지 집이 주는 느낌이 이전과 좀 달랐다. 차게 부는 바람은 쓸쓸했고 텃밭에는 생기가 없이 갈라진 흙 위에 잘은 덩이들이 뒹굴었다.
이 집에서 살았던 6개월의 시간에 윤영은 스물한 살이었다. 낯선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우주의 행성들처럼 천천히 윤영을 감싸고돌았다. 정원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 놓인 간이 테이블, 그 테이블 옆 작은 그릴판에서 땀을 흘리며 두터운 고기를 올려 굽던 다니엘의 옆모습. 윤영은 느티나무 둥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빛이 흘러 윤영의 다리에 작은 조각으로 닿았다. 그런 작은 것들의 시간이 어쩌면 윤영이 이곳에 온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기억은 늘 어딘가의 틈을 통해 변주되며 인간을 모욕하는 법이다. 환한 빛과 나무의 그늘, 둥지 옆에 세워 둔 작은 목각 오리가 그랬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사는 동안 틈이 되어 윤영의 기억을 변주시켜 애틋한 기분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옆집의 블라인드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던 건 그때였다. 윤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 집에 홀로 사는 볼니 씨의 유일한 말동무 토마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살짝 벗겨지고 키가 크고 마른 몸 때문에 늘 등이 조금 굽은 채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던 토마스. 기대하는 윤영의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토마스가 윤영을 알아보고 서로 인사를 하게 된다면, 이곳이 역시 낯설지 않은 곳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천천히, 블라인드가 끝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윤영의 시야에 차오른 것은. 어떤 젊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윤영은 당황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틀어 버렸다. 이곳에도 물론 변하는 것이 있지, 하고 생각했다.
볼니 씨가 1층 정원으로 이어진 문을 열었던 것은 10시가 다 되었을 때였다. 어제 오후에 인사를 하고 윤영을 2층으로 올려 보냈던 볼니 씨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지친 노인의 얼굴이 윤영의 앞에 그림처럼 지나갔다. 볼니 씨는 근육에 힘을 주어 큼직큼직하게 블라인드를 올리더니 거실에 난 창문을 돌아가며 반 정도 열었다. 느티나무에 기대 있는 윤영을 발견한 볼니 씨가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커피와 빵이 있는데, 잼은 없고 올려 먹을 거라곤 치즈와 햄뿐이다. 그래도 좋다면 이쪽으로 오렴.”
윤영은 고개를 돌려 토마스의 집을 다시 한번 흘끗 보고는 볼니 씨의 부엌으로 갔다. 변하지 않은 게 이상할 만큼의 시간이 당연히 흘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