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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안 Nov 18. 2022

볼니와 윤영

4

  헤나는 원래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 주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윤영에게는 물론이고 오랜만에 만난 아들도 본체만체 눈을 흘기는 것으로 어정쩡한 인사를 치렀다. 표현이 서툰 것이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고 그것이 헤나 나름 반가움의 표시이기도 하다는 걸 윤영은 알고 있었다. 

  헤나는 트렁크에서 푸른색 체크무늬 헝겊으로 뒤덮인 바구니를 꺼내는 중이었다. 음식 만들 재료가 들어 있다는 말도 머쓱해 괜히 꺼내는 것 같았다. 선글라스를 쓴 칠십 대 할머니가 된 헤나는 윤영에게 눈을 찡긋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어설픈 인사를 다시 한번 건넨 후에 트렁크를 닫고 집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니엘은 헤나의 자동차 뒤에 주차된 자신의 차바퀴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윤영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는 못 보던 사이 건장한 남자가 되어 있었는데, 엄마보다는 아빠 쪽을 더 많이 닮아 볼에 살이 많고 풍채도 좋았다. 

  “네가 온다고 했을 때 아빠 혼자 사는 것 때문에 네가 오해할까 봐 제일 걱정한 사람은 아빠야.” 

  윤영은 괜찮다는 표시로 살짝 입술을 들어 웃었다.

  “불편하면 엄마 집이나 내가 사는 집으로 와도 돼. 너만 좋으면. 우리는 일단 다 네 편이니까.”

  까칠한 헤나. 냉정한 다니엘. 말 많은 볼니 씨 중 하나를 골랐어야 했다면, 그래도 볼니 씨가 가장 낫지 않았을까. 윤영은 예의를 갖춰 살짝 웃으며 다니엘을 따라 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부엌으로 들어간 헤나가 재료를 씻고 썰고 볶는 동안, 볼니 씨가 윤영을 식탁으로 불러들였다. 오랜만에 윤영을 보는 거라 호기심이 일었던 모양인지 다니엘도 어느새 와 앉았다. 7년 전 봄이 재구성되듯, 같은 공간에 같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70년대부터 있었다던 단이 낮은 서랍장과 그 위에 있는 볼니 씨 어머니의 자수 작품과 아버지의 옆모습이 찍힌 흑백 사진도 그대로였고, 낡고 검은 라디오도 조금 더 낡았을 뿐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보다 조금 더 주름진 얼굴의 볼니 씨와 그때보다 조금 더 수염이 굵고 단단해진 다니엘이, 칠 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온 네 명의 인간이 물건들보다 조금 더 눈에 띄게 변해 있을 뿐이었다. 

  볼니 씨와 다니엘은 윤영에게도 관심 있는 어떤 주제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는 듯 케이 문화와 케이팝에 대해, 오징어게임과 방탄소년단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인의 대단한 열정과 성실함을 높이 샀다. 한국이 세상에 보여준 튼튼한 방역체계와 빠르고 편리한 디지털 인프라와 곧 가능할지도 모르는 통일은 한국의 경쟁력을 더 높여 줄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넌 대체 왜 한국을 떠나오겠다는 거야?”

  다니엘이 물었다. 윤영이 뜸을 들이다 말했다.

  “방금 둘은 한국의 보이는 점에 대해서만 말했잖아. 한국은 완벽히 경쟁 지향적인 사회야. 알아서 살아남지 않으면 죽는 나라. 세계가 열광하는 대부분의 한국 콘텐츠들에도 계급의 문제가 주제로 쓰여 있지. 그곳에 살다 보면 숨이 막히고 나는 그곳에 어울리는 인간이 아냐.” 

  그러자 다니엘이 말했다. 

  “적자생존이야 어느 나라든.”

  다니엘은 그 얘기를 하면서 볼니 씨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게 볼니 씨가 평생 해 왔던 말이라는 건 윤영도 다니엘도 잘 알았다. 

  1945년 2월, 볼니 씨의 가족은 영국군이 드레스덴을 침공한 다음날 이미 자신들이 살 나라를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번의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국민은 본인들이 나서서 전쟁을 일으키자고 선택한 것은 아니었으나 죄인이 되어야 마땅했다. 국가가 완전히 망해 버리기 전에 그들은 선택을 해야 했는데, 폴란드로 망명을 할 것이냐 독일 본토로 들어갈 것이냐가 고민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때 폴란드에서 가장 먼 독일 서부로 떠나자는 결정을 내린 건 볼니 씨의 어머니였다. 

  여보, 우리는 어디서든 손가락질을 당할 거예요. 그러니 살아남을 곳으로 가야 해요. 

  폴란드로 가는 위험을 감수했더라면 아마 볼니 씨는 돌팔매를 맞으며 학교를 다녔을 거라고 했다. 폴란드를 선택했던 볼니 씨 큰 아버지의 아들은 열여섯 살이 되는 해에 아이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학교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했다. 살아남아 생존하는 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겠냐고 볼니 씨는 말했다. 

  “우리도 난민이었지. 지금 저 시리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만 난민인 게 아니라. 우리도 떠돌아다니던 사람들이었어.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윤영은 다니엘을 바라봤다. 2015년의 다니엘이 어땠는지 윤영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시리아 난민 반대 시위를 격하게 찬성하는 볼니 씨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다니엘. 그들을 보호하려고 애쓰는 독일인들은 제 뿌리를 기꺼이 잃어버리는 멍청한 치들이라고 소리치던 볼니 씨의 말, 난민 관련된 뉴스를 보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볼니 씨의 성난 모습. 다니엘이 그런 아버지를 뒤에 두고 부엌에서 했던 이야기를 윤영은 기억했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었어. 좋은 조롱거리였거든. 너네 아빠는 발음이 왜 저래? 너네 같은 애들을 2등 시민이라고 한다며? 애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놀리곤 했고.” 

  다니엘에게서 그 이야기를 듣던 때에도 볼니 씨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화를 내는 중이었다. 저런 인간들을 받아 주느니 독일인들한테나 더 잘하라고. 멍청한 행정 관료들은 다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그것은 윤영이 태어나 본 광경 중에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이었다. 어딘가에서 이미 떠나온 사람이, 또 어딘가에서 떠나온 사람을 비난하는 광경. 다시 떠올려 보니 고국을 견디지 못해 이주를 하겠다는 윤영의 결심은 사실 그에게 이해받지 못했어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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