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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고 한참이 지난 뒤에 1층의 블라인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러고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야 볼니 씨는 인터폰으로 윤영에게 함께 아침을 먹을 건지 물었다. 윤영이 집에 들어온 지 이주일이 가까워지도록 한 번도 장을 보러 가지 않았으므로 집에는 여전히 먹을 것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윤영이 혼자서 장을 보러 가는 것에도 볼니 씨가 찬성하는 편은 아니었다. 함께 시장을 봐 와서 함께 요리를 해 먹어야 제맛이라는 거였다.
아침이라기보다 점심에 가깝긴 하지만 어제 남은 음식들도 있다며, 그는 그거라도 먹겠느냐고 물었다. 윤영은 빵 한 조각에 커피 한 잔이면 족하다고 했다. 어제 밥이든 말이든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식욕이 전혀 돌지 않았다.
윤영이 1층으로 내려갔을 때 볼니 씨는 창고에서 거의 새것에 가까운 파라솔과 테이블을 꺼내 하나씩 정원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이게 다 뭐예요?”
“기왕 먹을 것, 파라솔에 앉아 초록을 감상하며 먹자.”
윤영은 고개를 돌려 초록의 나뭇가지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광경을 몇 번이나 바라봤다. 오전의 햇살이 나뭇가지들마다 앉아 하얗게 빛을 부려 냈다. 볼니 씨는 의연했다. 어제 아무런 일도 겪지 않은 사람 같았다. 오히려 조금 들뜬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테이블 다리로 바닥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테이블 가운데 구멍에 샛노란 파라솔을 꽂고 같은 색상의 줄무늬 방석이 깔린 플라스틱 의자들을 잔디 위에 놓으며, 볼니 씨는 오랜만에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하는 사람처럼 활동적이었다.
그것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결국 윤영도 일어나면서 무언가 거들게 없는지 물었다. 그러자 볼니 씨는 괜찮다고, 그런 것 할 힘 정도는 남아 있다고, 노인이라고 무시하지 말라고, 의자에 앉아 풍경이나 구경하라고 말했다. 윤영은 정원을 한번 둘러봤다. 잔디가 깔린 정원 끝에 밑동이 굵은 나무가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볼니 씨 혼자 정원 전체를 돌볼 재간은 없었던지 깨끗하게 잘 깎인 잔디들과 다르게 다듬어지지 않은 나뭇잎들이 뾰족뾰족했다. 잘 깎인 잔디와 잎이 엉망인 나무. 그게 볼니 씨의 지금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보이는 볼니 씨와 엉망이 된 볼니 씨를 다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다 한데 모여 있었다. 잘 깎인 잔디, 엉망으로 자란 나무, 그리고 볼니 씨와 윤영.
파라솔 세팅을 마친 볼니 씨는 다시 창고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커다란 풍선을 하나 들고 왔다. 그 모습을 보고 윤영이 소리쳤다.
“알고 보면 이 집에는 정말 없는 게 없네요.”
볼니 씨가 풍선에 헬륨가스를 넣는 동안 윤영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침 식사 거리라도 날라볼 요량이었다. 볼니 씨는 사실 그것조차 자신의 일이라고 했는데, 그것까지 하지 않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 칠순이 훌쩍 넘은 볼니 씨가 풍선을 부풀리고 커피를 내리고 오븐에서 빵을 꺼내 오는 장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커피용품은 오른쪽 아래 서랍, 달걀 삶는 기계와 빵 자르는 도구들은 왼쪽 서랍, 접시와 유리잔은 반대편 천장. 모든 게 그저 조금씩 낡아가며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7년 전 윤영이 선물했던 머그잔도 그곳에 여전히 있었다. 싱크대 위에는 이미 40년도 더 된 도자기 필터 사이로 커피 방울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커피가 만들어지는 그 모습이 이 집안을 닮아있었다. 모든 것이 천천히, 급하지 않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윤영은 부엌 창밖으로 천성이 게으른 볼니 씨가 윤영과의 아침에 들떠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븐에서 청량한 알람이 울렸다. 윤영은 이동식 오븐의 뚜껑을 내려 이제 막 구워진 바게트 빵 두 개를 집어 바구니에 올렸다. 작은 쟁반 위에 빵 바구니와 치즈, 햄, 볼니 씨가 먹을 생양파가 담겨 있는 작은 통을 함께 올렸다.
쟁반을 들고 윤영이 밖으로 나갔을 때, 볼니 씨는 어제 토마스의 집 창가에 있던 그 여자, 토마스의 젊은 연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 여자는 이미 윤영을 보았으며, 윤영이 어째서 그 집에 있는지 궁금했고, 그래서 볼니 씨와 윤영이 정원에 있는 차에 인사를 하러 정원으로 나왔다고 했다. 볼니 씨가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하자, 여자는 담장을 대신한 작은 둔덕을 넘어왔다.
“저는 요나예요.”
여자는 윤영에게 손을 내밀어 인사했다. 손 안쪽이 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볼니 씨가 윤영을 소개했다.
윤영은 한국에서 왔고 – 한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 줄은 잘 알죠? - 교육을 잘 받았으며 – 대학 등록 비율이 90%가 넘는 한국이 어느 정도의 교육 강국인지 이해하겠어요? - 독일에서 이런 인재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고 - 독일이 멍청해서 난민들을 저렇게 대책 없이 받아들이는 거라고 -. 그렇게 윤영을 소개하는 것인지,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뽐내는 것인지 모를 이야기를 한참 동안 했다.
“나중에 같이 저녁 한 끼 해요.”
요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차라도 한잔 함께 하자는 볼니 씨의 말에는 완강히 거절했다. 너무 급하게 나와서 지금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윤영은 잠자코 요나와 볼니 씨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필터에서 물과 원두가 만나 쓰고 신 검은색 음료로 변한 눈앞의 커피를 바라보며. 그게 마치 방금들은 말들의 조합처럼 성글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의 대화는 서로의 모국어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언어 밖에는 언어보다 읽어 내야 하는 행간이 많았다. 가령 이런 것. 요나는 볼니 씨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요나는 어째서 팔짱 낀 손을 좀처럼 풀지 않는지), 둘 간의 마음의 거리는 어느 정도 되는지(요나는 혼자서 이 집에 살고 있는 볼니 씨의 상황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친절과 진심을 담고 있는지(담을 넘어올 정도로 윤영이 궁금했다는 게 윤영에 대한 어떤 종류의 호기심인지).
요나가 집으로 돌아가고 난 후에도 잔디 위의 볼니 씨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다 부풀어진 하얀색 풍선의 꼭지를 하얀 실로 엮고 있었다. 볼니 씨는 어제 저녁식사처럼, 요나의 방문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오해를 할 테면 하고, 생각을 할 테면 하라지 하는 식이었다. 그런 볼니 씨는 어째서 윤영과의 아침 식사에 들뜬 걸까. 볼니 씨가 윤영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대체 언어로 설명이 가능하긴 한 걸까.
아니, 언어라는 속박의 세계가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긴 한 걸까. 역사의 중심에 있던 볼니 씨, 역사를 기꺼이 벗어나겠다는 윤영. 뿌리를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볼니 씨, 뿌리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윤영. 차라리 볼니 씨와 윤영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평생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걸 서로 알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