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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안 Nov 18. 2022

볼니와 윤영

7

  볼니 씨의 세계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윤영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들어가며 볼니 씨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는 것이, 일순간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지금 볼니 씨가 윤영을 위해 하얀색 풍선의 꼭지를 실로 엮는데 열중이라는 것뿐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건 도무지 실체가 없으니.

  윤영은 테이블 위에 쟁반을 올려둔 후에 볼니 씨의 커피 잔을 한쪽에 두고 제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젯밤 헤나는 그런 말을 했다. 당신은 당신의 뿌리 안에 갇혀 살다가 현재를 잃어버리는 사람이라고. 당신의 정체성으로 뒤덮여 있는 이 집안에서 당신은 진짜 아빠 역할을 해 본 적이 없었으며 아내인 헤나 자신마저 평생 이 집의 손님이었을 뿐이라고. 윤영의 아빠일 필요도 없고 남편일 필요도 없는 지금의 볼니 씨는 커피를 한 잔 마시겠다고 혼자서 4인용 철제 테이블을 옮기고 파라솔을 펴고 닦고 풍선을 부는 중이었다. 볼니 씨의 역사와 그것을 지키려던 의지의 언어들은, 이미 없어진 그의 고향 브레슬라우처럼 사라져 버릴까. 

  커피 잔을 입술에서 뗀 후에 한참 동안 볼니 씨의 뭉툭하고 거친 손을 바라보던 윤영의 입에서 문득 이런 말이 나왔다. 

  “다니엘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인가에 다 묶여 사는 것 아닐까요?” 

  볼니 씨는 풍선에 엮인 실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 풍선처럼 말이지.”

  볼니 씨가 말하면서 풍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볼니 씨는 그 풍선을 손에 쥐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야무지게 실을 잡아 묶는 중이었다. 윤영은 파라솔에서 시선을 돌렸다. 

  사람마다 쥐고 있는 집착이라는 것이, 어쩌면 저런 풍선 실 같은 게 아닐까 윤영은 생각했다. 있다고 믿으면 있게 되는 것.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겠지만 또다시 어딘가에 내려앉을 것이 분명한 무언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을 것. 그것이 볼니 씨와 윤영 자신은 아닐까. 



  “커피 맛있네요.” 

  윤영이 그렇게 말했고 볼니 씨는 답했다. 

  “어쩌다 보니 맛있어졌나 보네. 실수다 그거.” 

  볼니 씨는 그 말을 하더니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것은 볼니 씨의 말투이자 살아온 방식이었다. 의연한 척, 아무것도 아닌 척, 강한 척. 고향의 깃발을 집안 곳곳에 꽂아 두고 그곳을 기억하며 살아온 그는 사실 자신의 삶을 견디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겪어온 역사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친 바람이라, 그것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어제 있었던 가족과의 일 같은 것 정도는 별일도 아니라고, 그 저녁 식사에서 수치심 같은 것은 없었다고, 그렇게 온몸으로 말하는 볼니 씨를 윤영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고 그 시간은 언젠가 끝날 것이 틀림없고 그가 지나온 시간들은 천천히 역사라는 틀 안에 갇혀 반복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것만은 당장 앞에 있는 현실이었다. 

  1944년에 태어나 팔십 년 가까이 숨을 쉬고 살아온 헬무트 볼니 씨와, 1994년에 태어나 삼십 년 가까이 살았지만 숨만 겨우 붙이며 살아온 것 같은 윤영이, 멀리 전나무가 빽빽하게 드리워진 검은 숲을 배경 삼은 집의 정원에서, 햇빛을 받은 파라솔 아래 의자에 앉아 하얀색 풍선이 띄워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둘의 시간과 둘의 언어가 겹치는 중이었다. 유해하면서 무해한 감정들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감정들이 겹치고 있었다. 역사란 엇갈리는 지점에서 다시 만나며 번복되곤 하는 것이고 볼니 씨와 윤영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것은 또 수천수백 겹의 시간 중에 단지 한순간일 뿐이기도 했다. 누구를 완전히 이해하고, 누구와 완전한 소통을 해야 하는 거, 그런 것 좀 못하면 어때. 윤영은 고개를 내려 볼니 씨가 꼭 붙잡은 하얀 실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이윽고 볼니 씨는 파라솔 가까이 풍선을 가져와 실을 제 쪽으로 당겼다가 가볍게 놓아주었다. 차고 맑은 바람이 불어와 윤영의 손을 스치더니 풍선을 데리고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바람의 결을 따라 하얀색 풍선이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왼쪽으로 움직이며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멀리, 멀리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서 윤영은 한동안 시선을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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