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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안 Nov 18. 2022

볼니와 윤영

5

  마침 헤나가 접시를 들고 테이블로 나타났다. 맑은 야채수프와 따뜻하게 구워진 빵이 식탁에 차례차례 오르고 있었다. 헤나가 자리에 앉자 볼니 씨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아까 하려던 이야기 계속해도 될까?”

  헤나는 크게 반응하고 싶지 않은지 답 없이 폭이 깊은 수저만 들었다 놓았다. 윤영과 다니엘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윤영과 세 사람도 7년 만에 만나는 자리였지만 볼니 씨와 헤나 역시 꽤나 오랜만에 보는 자리였고, 헤나가 이 집에 왔을 때마다 2층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숲 해설사 일을 한 후에는 바로 집이 있는 슈투트가르트로 돌아가 버렸으므로, 헤나와 볼니 씨가 대화다운 대화를 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도 윤영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에 해.”

  아이들도 있으니 다음에 시간이 될 때 이야기를 마저 하자는 말이었다. 

  “다음에 하자고 하고선 당신이 정말 나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헤나는 수저를 놓으며 물었다.

  “대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뭔데?”

  헤나는 자기 생각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볼니 씨 같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스스로 엄격한 통제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본인의 선천적 성향이라기보다는 낙천적이지만 타인을 배려할 줄 몰랐던 볼니 씨와 함께 살며 길러진 습성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늘 대화는 볼니 씨가 추궁하고 헤나가 원치 않는 대답을 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한번 만들어진 습관은 방향을 틀기가 힘든 것인지 이들은 여전히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대화의 룰을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었다.

  “당신이 싫다고 하면 같이 살자는 말까지는 하지 않을게. 그렇지만 자주 이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 다니엘도 오고 윤영도 오니까 한결 집이 집 같아.”

  “그래서?”

  “그래서, 당신도 다니엘도 한 달에 한 번쯤은 찾아왔으면 좋겠다. 우리도 다른 가족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말이야. 성탄절이나 부활절이나, 새해 전야 같은 그런 기념일에 말이야.” 

  “이봐.”

  윤영은 오물거리던 입술을 멈췄다. 다니엘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움직임을 멈춘 그대로 음식을 씹는 중이었다. 헤나는 한숨 한번 쉬지 않고 말했다.

  “당신이 당신의 머릿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건 잘 알아.”

  “그게 무슨 말이야?”

  볼니 씨의 말에 헤나는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말라는 듯 퉁명스러운 어투로 답했다.

  “끊임없이 불쌍했던 과거만 복기하느라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은 자기 혼자일 뿐인 사람 말이야.” 

  순식간에 식탁 위의 공기가 매서워졌다. 윤영은 눈을 찔끔 감았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천천히 눈을 뜨며 윤영은 볼니 씨의 과거를 생각하고 있었다. 1944년 8월 2일 새벽 다섯 시, 독일령 슐레지엔 블레스라우에서 태어난 헬무트 볼니 씨. 전운이 감돌던 그 시절을 배경으로 자신을 주인공 삼아 살아온 그의 소설 같은 생애, 아니 역사. 시체가 즐비한 거리를 휘젓는 쥐 떼들, 손을 꽉 쥔 채 울지도 않고 그곳을 천천히 걸어 나가는 어린 볼니와 그의 가족. 보따리를 등에 멘 볼니 씨의 어머니와 그의 손을 꼭 잡은 어린 볼니 씨. 그렇게 수일을 걸어 독일 땅을 건너와 검디검은 숲이 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 터전을 잡은 볼니 씨의 가족, 어린 볼니가 웃으며 뛰어노는 산속의 놀이터. 그 뒤로 펼쳐진 검은 숲. 그것들에 대해. 볼니 씨가 감당해 온 독일과 그 시대에 대해. 

  윤영은 포크를 들어 수프의 건더기를 떠올렸다. 포크 날 사이로 국물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불쌍한 당신을 챙기느라 정작 당신이 우리에게 충실한 적은 없었잖아. 왜 이제 와 가장 노릇을 하고 싶은 건데?”

  조심스럽지만 날카로운 말투였다. 

  “가장 노릇이라니?” 

  “당신은 한 번도 아빠였던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아빠였던 적이 없었어?”

  헤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며, 입에 들어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음식물을 꼭꼭 씹어 먹다 명확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의 뿌리에 갇혀 사느라. 그 뿌리에 갇혀서 혼자 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지. 저 고루하기 짝이 없는 노란 깃발을 가방에 꽂고 연합군 비행기를 타 본 그 얘기라면 충분히 들어서 귀가 따가울 정도야. 실상은 뭔 줄 알아? 당신은 아이와 잠깐 가는 동네 산책도 귀찮아하는 사람이야.”

  “그만해.” 

  모두가 다니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 둘 곳 없었던 다니엘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은 윤영이었다. 윤영을 향한 눈빛이기보다 어쩌다 윤영 쪽으로 시선이 향한 상태였다. 

  “그만해. 엄마도 아빠도 다 갇혀 살지. 그게 누군가한테는 고향이고 누군가한테는 직업이고, 누구한테는 도망이고. 다 그런 거 아닌가?”

  다니엘은 맑은 수프 안에 들어 있는 살이 연한 소고기를 포크로 찔렀다. 그 포크가 제 살을 파고드는 느낌에 윤영은 배에 힘을 주었다. 다니엘은 태연하게 포크에 찔린 고기를 입에 넣었다. 그 태연함이 윤영에게 방금 전의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누구든 어떤 것에 갇혀 산다는 말이, 윤영의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도망이라는 말이, 윤영의 온몸을 포크로 콕콕 찔러대는 느낌이었다. 숨 막히는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 어디에도 매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것조차 무언가에 갇혀 있다는 증거라는 걸 이미 깨닫지는 않았느냐는 질문 같았다. 

  저녁 식사는 그렇게 끝이 나 버렸다. 그 후로도 차를 마시며 쿠키를 먹었고 윤영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간간이 흩어지듯 쏟아져 나왔지만, 호감으로 틈을 채운 맹렬한 대화는 없었다. 모두 각자 자신만의 갇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야기는 겉돌았다.

  다니엘과 헤나가 떠난 후 집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볼니 씨가 있는 아래층에서는 평소처럼 TV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잘 포장된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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