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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안 Nov 18. 2022

계절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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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집 원장님과는 퇴원에 필요한 서류들을 재차 확인하고 일 년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의논했다. 아이도 상황이 단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만만치 않은 건 내 쪽이었다. 우선 일 년 동안 휴직을 할 수 있고, 일 년 후에는······. 그 생각을 하다 보면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 놓여 있어 이미 걸어가고 있긴 하지만, 인생이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준비하다 만 학위, 육아휴직 뒤에 자연스럽게 밀려난 승진, 아무것도 제대로 된 게 없는 것 같은 내 인생에 대한 복잡하고 노곤한, 아쉽지만 접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미련. 어떻게든,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우선 회사에는 일해 온 십 년 동안 한 번도 써본 적 없었던 배우자 파견 휴직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결혼한 다음 해 남편이 파견을 나갔으니 거의 3년 동안 쓸 수 있었어도 쓰지 않은 선택지였다. 3년을 어떻게 겨우 넘기고 난 후에 남편의 파견 기간이 연장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다시 3년 동안 혼자서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한다는 게 도무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결심이 선 상황을 회사에 알리긴 했지만 시기가 좋지 않은 건 내가 가장 잘 알았다. 팀장이든 실장이든 소장이든 휴직에 관련된 면담을 하러 갈 때마다 눈치가 보였다. 대놓고 핀잔하거나 불편함을 티 내는 상사는 없었다. 소장이 ‘업무 인수인계에 피해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말하긴 했어도 그건 조직을 총괄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충고였다. 역시나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연말의 분주한 기운에 섞여들지 못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아무래도 오직 나 한 명 뿐인 것 같았다. 

  실장에게 마지막 보고를 한 후에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팀 사람들과 시간에 사치를 부리며 차라도 한잔 하고 싶었다. 누구든 붙잡고 아무래도 내가 내린 결정이 내게는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그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고, 그런 종류의 위로를 듣고 싶었다. 팀 사람들은 다음 달 최종 보고회 일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고, 나는 그들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 갑자기 멈춰 서야 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저들과 같이 지금 일 년 중 가장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각자 담당하는 국가들이 다르고, 분야도 매년 새로워져서, 새로 배워야 할 것들도 많았고 정리해야 하는 서류들도 많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팀원들에게 더 미안했다. 나처럼 비교적 숙련된 인력이 갑자기 빠지면 팀에 공백이 생길 뿐 아니라, 당장 나를 대체할 수 있는 누군가를 뽑아야 할 텐데, 지금은 공채 시기도 아닌 데다 팀도 수시 채용을 진행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신입 직원을 트레이닝시켜야 할 팀장도 새로 맡은 내년도 남미 국가사업으로 쉴 틈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정말 미쳤지, 이런 상황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이라니. 그즈음 내 생각은 꽤 자주 그런 식으로 마무리됐다.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는 일상의 순서를 해치운 후에, 잠든 아이 품에서 빠져나와 겨우 노트북 가방을 챙겨 들고 거실로 나왔다. 차분하게 휴직계를 쓰고, 아까 품은 미안한 마음을 팀원들에게 메일로 전하려고 했다. 식탁 의자에 노트북을 펴고, 전원을 켜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가져와 자리에 앉아 티브이 뉴스 채널을 찾아 틀었다. 맥주 뚜껑이 탁 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열렸고, 시원하게 한 모금을 마신 후에 인트라넷에 접속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때 긴급 속보가 들려왔다. 

  앵커는 차분한 목소리로 중국에 지난 늦가을에 발발한 폐렴 환자가 최근 급증해 교민들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앵커가 기자에게 마이크를 넘기자 기자가 중국의 병원에 북적이는 사람들을 찍은 동영상을 앞세워 아마도 그것이 중증급속호흡기증후군인 사스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뉴스로 느껴져서 하마터면 채널을 돌려버릴 뻔했다. 내게는 그게 마치, ‘강원도 원주에서 발발한 조류독감’처럼 멀고 실체가 희미한 말로 들렸다. 다만 그게 중국이라길래 그저 한 번 더 눈길이 가서 나는 리모컨 대신 맥주를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마침 로그인이 필요하다는 창에 내 사번과 비밀번호를 넣고 완료 버튼을 눌렀다. 비번이 틀렸다는 안내 공지가 나타났다. 이상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곧 화면이 바뀌면서 다시 앵커가 말을 이었다. 우한의 지도를 보여주기에 청두와 그곳이 얼마나 가까운가 싶어서, 정말 단순히 그것 때문에, 그 뉴스가 대체 뭔지 한 번 더 보려고 티브이 쪽으로 더 고개를 뻗었다. 화면은 한 전통 시장을 비추고 있었고, 그곳에서 매매를 한다는 각종 동물들이, 그물에 갇힌 박쥐와 원숭이와 뱀들이 화면의 어지러운 앵글에 잡혔다. 비번이 다시 틀렸다는 공지가 팝업창에 떴다. 아,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그렇게 서너 번 비밀번호를 더 틀리는 사이에 도진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중국 지사의 지사장이 폐렴에 걸렸다는데, 유행성이라 그런지 보건 당국에서 직접 나와 조사를 시작했다고,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다고.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거였다. 일단 큰 걱정은 하지 말라는 도진에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마음으로 썼다. 건강 조심하라고, 폐렴이 요즘 무슨 큰 병이냐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그렇게 말하고 다섯 번 틀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된 인트라넷을 보면서, 벌써 휴직인 걸 알고 비번도 안 먹히는 건가 싶어 어이없이 웃으며, 그렇게 맥주를 다 마시고 아이 곁으로 들어가 잠을 자기 시작했다.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이 될 줄 그때는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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