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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일어났을 때 도진에게서는 ‘출국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고 교민들도 준비를 단단히 할 기세니 쉽게 움직이지 말고 일단 기다려 보자는 거였다. 솔직히 나는 그 순간 화가 났다. 이틀 후면 출국인데 그럼 비행기 표를 취소해야 하느냐는 말에 그건 다시 생각해보자는 도진의 대답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였다. 파주에서 유행성 폐렴이 발발했다고 해서 울산에 있는 사람이 긴장을 하지는 않지 않나.
도진이 모르는 이쪽 상황은 또 어떤가 말이다. 회사 사람들과 어린이집에는 이미 작별인사를 했고, 부치고 챙겨야 하는 짐은 얼마나 많았으며 이제 그 지난한 과정을 모두 끝내고 비행기만 타면 되는 마당에 대체 뭘 기다려보자는 말인지.
어쨌든 알겠다고 짧게 대답한 후에 한숨을 크게 쉬고 차곡차곡 올려둔 짐들을 바라봤다. 상황이 정말 심각한 건가. 최근에 부쩍 자주 드나들기 시작한 중정공 게시판에 가서 폐렴을 검색했지만 딱히 눈에 띄는 내용이 없었다. 중국 폐렴, 유행성 폐렴, 청두, 이런 것들도 질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검색어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업데이트 버튼만 계속 눌러댔다.
그사이 일어난 재인이를 먹이고 씻긴 후에 밖으로 무작정 데리고 나갔다. 이미 열한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커피를 한 잔 하고 싶었지만 이 근처에는 조용하고 작은 카페뿐이라 우리의 존재가 방해가 될 것이었고 늘 가던 키즈 카페 커피는 맛이 없었지만 별 다른 옵션도 없었다.
키즈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돌아서는 순간 재인이가 아빠랑 같이 노는 다른 아이들을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런 재인이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재인이는 그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내게 달려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후에는 아빠와 분수대도 가고 공원도 갈 거라고. 중국은 낯설지만 아빠와 함께 하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아이의 단어 선택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나는 할 말을 잃고 맞장구만 쳤다.
“맞아, 재인이가 아빠랑 같이 공원에 가는 거 좋아하지.”
한참을 아빠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더니 재인이는 클라이밍 판으로 가 가짜 돌을 뺐다 넣었다를 한참이나 반복했다. 친구들이 다가오는데도 곁을 잘 주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재인이는 낯선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타입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건 나의 성격이기도 했으며 그나마 우리 셋 중에 도진이 가장 외향적인 사람이었다. 나는 재인이가 참 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내향적이었더라도 동생이 있어서 외롭지 않았는데, 내가 동생을 낳아주지 않으면 재인이는 평생 저렇게 외로운 뒷모습을 내게 보여주겠구나. 그래서 도진에게 다시 전화가 오면 무조건 가겠다고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국에서 낳더라도, 둘째를 생각해보자고.
오후에 도진은 다시 전화를 걸어와 첫마디에 표를 취소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짜증이 솟구친 탓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져있었다.
“그럼 나 회사는? 회사에 이주 안에 보딩 티켓 제출해야 해. 재인이 어린이집은 어쩌고? 우리 늦게 가면 전세 일자도 안 맞는단 말이야.”
도진은 자꾸 이 일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나는 화를 누르며 ‘나도 안다’고 말했다. 신종플루도 사스도 메르스도 나도 다 뉴스에서 봤다고. 괜히 겁먹어서 사람 긴장하게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다 듣고 도진이 대답했다.
“지사장님, 지금 중환자실에 계셔. 도시가 봉쇄 조치에 들어간대.”
눈만 끔뻑이며 나는 그 말을 듣고 있었다. 핑크퐁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재인이가 갑자기 일어나 냉장고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게 그 정도로 심각한 거야?”
그 순간 정말 많은 생각이 오갔다. 차라리 지금 가면 봉쇄가 되기 전에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 때, 다시 도진이 말했다.
“들어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봉쇄가 될 수 있는 상황이래. 그냥 전염성 폐렴 정도가 아닌 것 같아. 문제는 너랑 재인이가 들어왔을 때 공항에 발이 묶일 수도 있고 그렇대. 못 들어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있다고 하고.”
그 얘기까지 들었을 때 뒷골이 빳빳해졌다. 같은 회사 사람이 중환자실에 있을 정도로 아프고 그 정도 파급력의 전염병이 돌고 있고 곧 도시가 봉쇄 조치에 들어간다면, 도진은 무사한 건가?
“오빠. 오빠는 괜찮아?”
도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빠 괜찮은 거냐고. 어?”
그러고 보니 회사라면 한참 점심시간일 시간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기분 나쁘게 조용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