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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안 Nov 18. 2022

계절일기

5

  그 사이에 슬그머니 해가 바뀌어 있었다.  

  연말을 보낸 후에 회사는 바쁜 공기가 한결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팀 사람들은 최종 보고회 때문에 각자가 맡은 국가에 대부분 출장을 가 있었고, 내 담당 국가인 미얀마에는 내가 비운 자리를 채우기 위해 팀장과 실장이 총동원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소장은 내 사정을 의심 없이 들으면서 그렇지 않아도 요즘 중국 쪽 정보를 듣고 나를 떠올렸었다고, 사스나 메르스 때처럼 일이 커질 수 있다는 말에 차라리 가지 않는 쪽이 더 안전한 것 아닌가 내심 생각을 했었다는 말로 나를 달래주었다. 그래도 일 년 중 가장 바쁜 최종 보고회 시즌에 내가 없었다는 사실은 나를 알 수 없는 깊이로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자리로 돌아와 나는 미얀마에 있는 팀장과 전화를 하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팀장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 어서 비행기를 타고 미얀마로 건너오라’는 말을 유머를 섞어했는데,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을 팀장에게 미안해 돌아오면 점심 한 끼를 꼭 사겠다는 말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여섯 살 아이가 있는 팀장에게 재인이의 이야기를 했을 때, 팀장은 이번 1월에 회사 어린이집에 대대적인 변화가 있어서 자리가 날 수도 있으니 연락을 해보라고 말했다. 시간이 남으면 어서 회사 여행사에 전화해 미얀마 비행기 티켓이나 끊으라는 말과 함께. 다음에는 국가 하나를 더 맡겠다는 말로 나는 팀장을 안심시켰고, 팀장은 ‘그럼 이번에 너 멕시코랑 방글라데시까지 어때?’라는 말로 나의 의지와 고마움을 상쇄시켰다. 한 국가에 고정적으로 세 번 출장을 가고, 한 회에 출장 기간이 일주일에서 열흘이 걸리는 걸 감안한다면, 12개월 중 4개월 정도는 아이가 나 없이 지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출장 다니게 해 주면 가능하다’는 내 답변에 ‘너는 틀렸다’는 웃음 섞인 답을 들으며, 나는 팀장에게 다시 한번 정말 미안하는 말을 남겼다. 팀장과의 전화를 끊고 곧바로 직장 내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었고, 이번에 노사위원회 결정으로 입원할 아이들 수를 늘렸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그렇게 도진이 없는 아이와 나, 둘 만의 새로운 시간들이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도진은 며칠 동안 집 안에서만 생활한 끝에 다행히 회사에 다시 출근할 수 있었다. 지사장은 회복되었지만 완전히 쾌차하지는 못하고 음압 병실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자주 피로를 느끼고 특히 몇 가지 신체 감각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그즈음에 청두에 다시 감염자들이 발발하기 시작해 몇 주가 지난 후에는 정말 도시 전체가 봉쇄에 들어갔다. 도진은 밖으로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집안에 격리되었다.

  도진의 삶이 봉쇄되는 것과 별개로 내 삶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져 갔다. 

  나는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말고 베트남을 한 국가 더 맡았다. 물리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연말에 지은 죄가 있어 팀 사람들에게 미안하던 찰나에 오히려 잘 되었다고 좋게 생각했다. 학위 논문을 써서 졸업을 한다거나 승진을 원한다거나 하는 욕구는 거의 소멸되고 없었다. 그냥 한 해 동안 아이가 건강히 잘 크고, 회사 일을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시간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업무를 더 맡겠다고 했을 때 팀장은 물론 환영했지만 정말 괜찮겠냐고도 여러 번 되물었다. 손이 부족하고 사업이 번창해가는 상황에서 내가 이 정도로 회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충분히 괜찮았다.

  좋은 일도 생겼다. 아이가 직장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점심시간에도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점심을 대강 때우고 아이를 보러 1층의 어린이집으로 내려가는 일이 많아졌다. 재인이가 곁에 있다는 것은 기쁨의 감정을 넘어 안도와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도진은 회사 상황이 좀 안정되면 오히려 한국으로 들어가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 나도 바라는 바였지만 그 말은 도진이 지난 3년 동안 꾸준히 해왔던 말이어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걸 나는 이미 잘 알았다. 도진의 회사 지사장님은 그동안에도 계속해서 상태가 호전되었다 악화되었다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은 꾸역꾸역 갔다.  



  국내에 결국 이 호흡기 전염병이 유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건 그로부터 몇 주가 흐른 뒤였다. 무엇이라도 비난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은 중국의 동물 매매와 식문화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비난을 들으며 중국에 이미 빠른 속도로 퍼졌다는 전염병과 그 안에 있는 남편을 떠올렸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고 나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내게 주어진 삶을 끌어가야 했다.

  우선 미얀마와 방글라데시, 베트남에 각각 업무 협약을 맺기 위해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일도 하고 육아도 하는 이 전쟁 같은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보려는 내가 안쓰러웠던 부모는 아이를 이주일 동안 맡아주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나는 부모에게도 죄송하고 어린이집에도 죄송하고 아이에게도 죄송한, 그런 날들을 보냈다. 협약식만 하고 오면 중간보고회까지는 시간이 좀 있을 터였으니 그나마 다행이었고, 팀장 역시 내 상황을 참작해 신참 후배 한 명을 더 붙여주었다. 

  우한 폐렴이니 신종 코로나니 다양하게 불리던 그 전염병에는 ‘코로나바이러스 19’라는 명칭이 번듯하게 붙었다. 그것의 명칭이 공식적으로 붙는 그 순간에 회사는 모든 해외 출장을 금지했다. 미얀마든, 방글라데시든, 더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출장을 대체할 수 있는 비대면 화상회의실을 만들었는데, 문제는 우리 쪽에서 장비를 갖춘다고 해도 그쪽의 장비가 잘 갖춰지지 않아 회의는 자주 엉망이 된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나라를 오가는 번잡함이 없었고, 그것은 내게도 잃었던 정신을 차츰 찾아가는 귀중한 기회를 제공했다. 재택근무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어린이집이 폐쇄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기까지 했다. 그 사이에 봄과 여름이, 가을이 갔다. 

  도진은 한 번도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는데 그건 회사의 정책이면서 동시에 이제 국가 정책이 되어버렸다. 한국에 들어올 기회가 아주 없지는 않았는데, 오고 가면서 사람들과 접촉을 하는 것보다 한 곳에 머무르는 게 좋겠다는 내 말에 도진이 동의했다. 뭐랄까, 도진이 여기에 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라면 굳이 그에게 스트레스를 받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는데, 도진이 흔쾌히 승낙하자 도리어 내 판단이 틀렸는가 싶어 잠시 머뭇거리기도 했다.  

  나의 일상은 아이와 회사로 나뉘었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필요한 준비물을 챙긴 후에, 나는 전날 저녁에 씻은 몸을 대강 물로 씻어내고 빗질도 하지 못한 채로 집을 나서기 일쑤였다. 회사에 가서는 휴식 시간 없이 8시간을 빠듯하게 일했고, 재택근무를 할 때는 분 단위까지 알뜰히 시간을 활용했다.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 분명히 있었고 가끔 심한 두통이 밀려들기도 했지만 버티며 일했다.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이도 잘 크고, 도진도 아프지 않고, 우리 둘 다 일자리를 잃지 않고 돈을 벌고 있고, 그러니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일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그건 전염병이 계속 도는 속에서도 내가 그 안에 휩쓸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이가 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그즈음이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나와 면담을 하고 싶어 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니 걱정 말고 오시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나는 더 걱정스럽게 들었다. 오후에 근무가 끝나면 내일부터 재택근무에 들어가니, 오늘 퇴근 후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시간 정도가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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