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밥

by 이상역

일찍 나온 초저녁달이

지붕 끝에서 울기에

평상에 내려와서

밥 먹고 울어라, 했더니


그날 식구들 밥그릇 속에는

별도 참 많이 뜨더라

찬 없이 보리밥 물 말어 먹는 저녁

옆에, 아버지 계시지 않더라(안도현, 「마당 밥」)


이 시를 읽노라면 시골에 살던 시절 가족들이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평상에서 훤한 달빛을 받으며 저녁을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밥상에 먹을 만한 반찬이 별로 없을 때는 보리밥에 물을 말아 후루룩 먹어 치웠다. 시인도 그런 기억을 되살려 물에 밥을 말아먹은 달 밤의 추억을 시로 녹여냈다.


시골에서 자라던 시절 생일을 맞은 자식에게 아침에 어머니가 차려주신 고봉밥이 생각난다. 어머니는 생일을 맞은 자식에게 흰 쌀로 지은 고봉밥과 미역국을 차려주셨다.


생일날 아침이면 하얀 고봉밥 먹기가 아까워 절반만 먹고 남겨두었다가 점심에 나머지를 먹었다. 그 시절만 해도 흰쌀밥을 먹는 날은 정해져 있었다. 가족 중에 누군가의 생일이나 제삿날이다.


최근에 직장에 다니면서 어머니가 계신 시골을 격주로 찾아간다. 사무실이 과천에서 세종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주중에는 세종에서 지내다가 주말에 서울로 올라가지 못할 때는 시골에 가서 어머니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한다.


주말에 혼자 세종에서 지내려면 끼니도 그렇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어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이다. 시골집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어머니의 건강 안부와 마을의 돌아가는 소식을 물어본다.

그러면 어머니는 마을에 고향을 떠난 사람이 고향에 돌아와 묻히거나 누구의 자식이 취직했다거나 결혼한 소식 등을 전해준다. 그렇게 인사말이 끝나고 나면 어머니는 내게 “밥은 먹고 왔느냐?”라고 물으신다.


내가 “아직 먹지 않았어요.”라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부엌에 가셔서 끼니를 챙기신다. 잠시 후 어머니는 생일날처럼 고봉밥이 담긴 밥상을 차려 놓고 나를 부르신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을 들고 안방에 와서 고봉밥을 먹다 다 먹지 못하고 남기면 어머니는 “왜 밥맛이 없느냐.”라고 묻는다. 나는 “밥맛이 없는 게 아니라 배가 너무 불러 다 못 먹어요.”라고 말씀을 드린다.


지금은 어머니가 차려주신 고봉밥을 다 먹을 수가 없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던 시절에는 고봉밥을 먹으며 체력을 버텼지만, 이제는 배도 덜 고프고 일이 고되지 않아 먹는 양이 줄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고봉밥을 먹을 때마다 생일날 받던 고봉밥이 생각난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고봉밥은 정성이자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자식이 출가하고 나자 어머니는 더는 생일을 맞은 자식에게 고봉밥을 차려줄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고봉밥 대신 자식의 생일에 전화해서 생일상을 잘 받았는지 안부를 묻는다.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여덟 자식의 생일을 일일이 기억해서 전화하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기억력은 참 건강해 보인다.


시골에서 자라던 시절 흰쌀로 지은 고봉밥은 최고의 자랑이자 먹거리였다. 오죽하면 할아버지 제삿날에 쌀밥이 먹고 싶어 졸음을 참아가며 잠을 자지 않고 제사 시간을 기다렸을까.


쌀밥을 먹어보기 위해 제사 시간을 기다리다 결국은 먹지도 못하고 눈을 뜨면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버지에게 왜 어제 잠을 깨우지 않고 아버지만 제사에 가셨느냐며 투정을 부리곤 했다.


요즈음은 살림살이도 나아지고 먹을거리가 풍성해서 쌀밥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 시골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고봉밥은 그냥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르다.


고봉밥에는 어머니의 따듯한 마음과 사랑이 듬뿍 들어있다. 가끔 허기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고봉밥을 다 먹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허기와 사랑을 채웠다는 포만감에 가슴에 사랑의 샘물이 솟아오른다.


이순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어머니에게 사랑을 소담하게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주말에도 시골에 어머니를 찾아가려고 한다.


고봉밥에 담긴 어머니의 정성과 사랑처럼 남은 생애에도 어머니에게 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싶다. 직장의 퇴직을 앞둔 나이에 격주로 시골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서 뵐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어머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자식들에게 사랑을 고봉밥에 담아 가득가득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하게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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