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일고 엷은 구름비는 개었건만
사립문 향하는 걸음걸이 다시금 더디네
구십일의 봄날을 시름 속에 보내며
운길산 꽃구경은 시기를 또 놓쳤구나
이 詩는 조선 시대 한음 이덕형이 지은 것이다. 이덕형은 임진왜란을 수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극심한 정쟁으로 국정이 혼미해지자 봄이 지난 초여름에 남양주 사제촌(한음마을)에 내려와 머물다가 수종사 주지 스님을 찾아가 우국충정에 우러난 마음을 詩로 남겼다.
남양주 운길산 자락에 자리 잡은 수종사를 올라가면 한강이 수려하게 내려다보인다. 수종사는 절 이름과 관련한 전설이 전해져 온다.
세조가 오대산 상원사에 가서 부스럼을 치료하고 한양으로 환궁하다 양수리에 다다르자 운길산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세조가 신하에게 종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자 신하가 다녀와서 천년 고찰 터의 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종소리로 들려오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세조는 그곳에 절을 복원시켜 수종사라 명하고 은행나무를 하사했다고 한다.
서울 송파에서 남양주 수종사를 가려면 외곽순환 고속도로를 타다 하남에서 6번 국도로 갈아타야 한다. 하남에서 6번 국도로 가다가 신양수대교를 건너기 전 조안교차로에서 45번 국도로 갈아타고 운길산역을 지나 얼마 가지 않으면 수종사로 가는 마을 입구가 나온다.
그 마을을 지나 운길산 입구에 차를 주차했다. 수종사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다. 조그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히고 마스크까지 써서 호흡이 더욱 가쁘다.
산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해 놓아 걷기가 더 힘들다.
산길 따라 한참을 올라가자 수종사 일주문이다.
일주문을 지나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오르자 이번에는 속세의 잡념을 떨쳐내고 오라는 사천왕을 거느린 내이문(來二門)이 기다린다.
수종사의 절은 특이하다. 보통 산사는 일주문을 지나면 스님이 거주하는 경내가 나오는데 수종사는 일주문과 내이문과 해탈문을 거쳐야 비로소 경내가 나온다.
내이문에서 해탈문으로 가는 길에는 콘크리트에 둥근 자갈을 섞어 깔아놓았다. 자갈이 돋아난 길은 나무숲과 어울려 조붓하다.
자갈을 밟으며 걸어가자 해탈문에 다다랐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밝고 올라가 해탈문을 지나자 드디어 수종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종사는 대웅보전과 응진전과 스님이 열반한 부도 석탑을 조밀하게 배치해 놓았다. 대웅보전 옆 범종각에는 커다란 범종이 매달려 있고, 그 옆에는 세조가 하사한 은행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다.
은행나무 둥치의 굵기나 나뭇가지가 사방으로 뻗은 모습이 족히 육백 년은 되어 보인다.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건물 옆 공터에 들어서자 한강의 유려한 강줄기와 주변의 풍광이 한꺼번에 시야로 들어온다.
저 멀리 강물에서 반짝이는 은빛 물결과 바람에 나뭇잎이 뒤척이는 숲을 바라보자 멋진 그림처럼 풍경으로 다가온다.
수종사는 가람을 아기자기하게 배치했다. 산사가 넓지 않아 한 바퀴 돌아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코로나로 여행을 다닐 수 없는 것 같은데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수종사를 찾아온다.
수종사를 한 바퀴 휘휘 돌아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곳에 올라올 때는 차가 별로 없었는데 내려갈 때가 되자 차가 많아졌다.
운길산을 내려올 때도 조심조심 내려왔다. 길을 내려오다 중간쯤에서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먹었다.
아내와 같이 간식을 먹는데 숲에선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팔각정에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수런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온다.
계단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나뭇잎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온다. 잠시 쉬었다 다시 일어나서 내려가자 주차된 차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에 올라가 산사를 구경하며 뜻하지 않게 한음 이덕형의 옛시조를 만났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 조상이 살아온 발자취가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운길산의 수종사나 은행나무나 이덕형은 나와는 깊게 연결될 만한 고리가 없다. 하지만 한 세대를 넘어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와 연결 짓다 보면 연결되지 않는 인연은 없다.
남양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곳 어디나 나와 너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에 젖어들자 지금 나는 어떤 역사의 현장을 가고 있고 그들과 어떤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하는 것에 의문만 가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