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에게 보낸 편지>
큰딸아!
요즈음 몸이 어떠니. 네 몸이 나아져야 할 텐데 걱정이다. 계절은 시간을 따라 여물어만 가는데 네 몸은 시간을 거슬러 거꾸로만 향해가는 것 같다.
아마도 지금이 네게는 가장 힘든 계절이란 생각이 든다. 집에서 엄마와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엿들었다. 네가 갈 길의 중심은 네가 바로 잡고 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라.
엄마가 전해주는 말에 의지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서 결정하기를 바란다.
아빠가 해주고 싶은 말은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네가 정한 목표를 향해 오롯이 정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라는 것이다.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권리이자 의무란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 과정에서 엄마와 아빠의 역할은 조타수일 뿐이다. 그렇다고 네 권리와 의무를 마음대로 결정짓고 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생을 살아본 사람의 이야기가 때로는 중요하고 방향을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았으면 한다. 네가 가는 길은 깊은 생각과 많은 것을 겪고 결정해서 가야 한다.
삶은 일상이 모여 집합체를 이루는 저수지란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성인이 된다거나 아니면 신데렐라처럼 유리구두로 공주가 되는 것은 동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하루를 얼마나 충실하게 보내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네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 간다. 삶은 단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임을 잊지 말아라.
너무 서둘러도 안 되고 조급하게 생각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삶은 시간이 축적되어 성장하는 것이지 조급하게 생각한다고 빠르게 성장하지는 않는다.
평촌에서 과천으로 통학한 지 벌써 수개월이 되었구나. 그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거라.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지를. 그리고 과천으로 오고 간 시간이 네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인지를.
사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면 기억나는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다. 하지만 너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성장해 간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보내는 시간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지만, 결과는 삼 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졸업할 때쯤 나타난다.
우리가 살아가는 단위를 시간을 나누어 생각해 보아라. 한 시간은 60분 하루는 24시간 한 달이면 수많은 시간이 쌓이고 일 년이면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 축적된다.
게다가 삼 년이면 큰 산도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쌓인다. 따라서 매 순간 다가오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나중에 결과가 달라진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보다 네가 배우면서 무엇을 얻었는지가 중요하다. 그 의미는 선생님이 전달하는 지식은 선생님의 지식일 뿐 그 지식을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머릿속에 흡수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네가 겪는 과정은 중요한 과정이고 그 과정은 누구도 대신하여 행할 수 없는 것임을 잊지 말아라. 하루의 한 시간이 소중하고 한 시간 중에 찰나적인 순간이 중요한 때다.
그런 순간에 해야 할 것도 많고, 시간이 없어 거들떠볼 여유조차 없어 놓쳐버린 것도 많다. 조선 시대 실학자 유득공은 책 한 권을 송두리째 외우기 위해 만 번을 읽었다.
오죽하면 말고삐를 잡은 하인이 유득공보다 더 잘 외워서 유득공이 외우다 막히면 대신 읊어주었다고 한다. 지금 네가 해야 할 것도 바로 그런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
글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읽고 또 읽는 집념이 있어야 한다. 어설픈 지식은 안 배운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한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또 문제의 정답을 맞혔다고 그에 대한 원리를 이해한 것도 아니란다.
글은 수없이 읽고 읽어서 개념을 파악해야만 세월이 흘러도 기억에 남게 된다. 요즈음 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학문하는 자세에는 추호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 항상 바른 마음의 자세로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는 것이 배우는 자의 길이다. 몸이 좋지 않다고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고, 몸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세월이다.
책상에 앉아 공부할 때는 바른 정신과 자세로 집중해서 하기 바란다. 그리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유지하기 바란다. 학창 시절에 형성된 습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고, 앞으로 네가 가고자 하는 삶의 분수령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거라.
봄이 와서 좋다고 했는데 신록이 짙어갈수록 몸이 점점 나른해져 가는데 걱정이다. 항상 머리를 맑게 하고 몸을 상쾌하게 유지하는 습관을 길들이기 바란다.
그런 자세로 책을 읽으면 글의 의미가 명료해지고 어려운 문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음이 우울할 때 글의 내용이 들어오지 않듯이 한번 책상에 앉으면 다른 상념은 접고 오롯이 공부에 몰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를 접고 소파에 앉아 소설이나 TV를 보며 머리를 식히는 편이 낫다. 그리고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한다. 사람은 약한 생각이 들면 나약해진다. 그때는 달콤한 말과 위로의 말에 기대고 의지하게 되는데 그런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으면 한다.
펜은 칼보다 무섭다는 말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보아왔듯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칼이 아니라 펜이다. 칼은 일시적인 힘을 갖지만, 펜은 영원한 힘을 갖게 된다.
우리 민족의 생명을 이어가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문과 무가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그 방향이 결정되었고 삶의 질서도 달라졌다.
사람이 강한 정신을 갖추는 것은 의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족을 이끈 영웅들이 그 자신의 의지로 영웅이 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사람에게 배워서 다져진 결과다.
아빠가 해주고 싶은 말은 강한 펜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사람의 저서를 많이 읽으라는 것이다. 오늘날은 옛날처럼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지 않고, 책을 통해 내적으로 정신을 강하게 단련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만큼 인쇄술과 대중매체와 인터넷이 발달해서 누구나 훌륭한 사람의 사상과 정신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요즈음 집과 학교를 오고 가는 시간조차 아깝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등하굣길에 단 일 분이라도 어떻게 보낼 것인지는 자신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지식을 스승에게 배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인생의 스승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네가 앞으로 가고 싶은 분야의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이 살았던 인생의 길을 더듬어 배우는 것도 의미가 있다. 고교 3년을 수학이나 영어나 국어와 같은 과목에만 매달려 시간을 보낸다면 얼마나 무의미하겠니.
인생은 이것저것 보고 듣고 살아가는 것이 풍성하고 여유롭다. 다른 것은 접고 교과목에만 매달리는 공부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네가 가고자 하는 분야의 인물이나 사상이나 이론들을 접하면서 생활하기를 바란다.
아빠가 바라는 것은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그전에 많은 것을 겪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인생을 풍성하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삶을 너무 조급해하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고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며 살아가는 너의 모습이 보고 싶다. 매일 공부라는 시간에 쫓겨 살아간다면 얼마나 고독하고 쓸쓸하겠니.
네가 지금은 배움이란 형설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 길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너의 몫이란 것을 잊지 말고 묵묵히 공부에 정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