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 달력을 바라보니 다음 주 수요일이 처서다. 처서는 늦여름의 더위가 물러나는 시기다. 조상이 만들어 놓은 계절의 절기를 생각하면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계절은 때가 되면 절기를 따라 찾아왔다 물러난다. 늦여름의 더위가 물러나고 가을이 몽글몽글 찾아오는 아침이다. 새벽녘에 찬 바람이 창가에서 불어와 이불을 슬그머니 끌어다 덮었다.
한낮의 더위는 여름이지만 저녁이면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지난주 말복과 입추가 지나고 처서가 다가오면서 가을의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
모처럼 가족과 2박 3일간 경북 영주를 거쳐 강원도 태백과 정선과 영월을 다녀왔다. 큰딸이 결혼하기 전 가족과 함께 한 여행이 된 셈이다.
가족여행에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지만, 여행은 내게 많은 인내와 지구력을 요한다. 2박 3일간 여행하면서 막노동인 운전기사 노릇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다.
이제는 남들처럼 차량 뒷좌석에 앉아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여행을 다녀보고 싶다. 그 소원이 언제쯤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신세로는 운전기사와 관광지 설명과 안내하는 역할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가족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저녁에 잠을 자는데 며칠새 날씨가 서늘해졌다. 2박 3일간 아주 먼 곳에 다녀왔다는 기분이 든다.
가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이틀 만에 계절이 변해가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2박 3일 여행 중에 폭우도 몇 차례 만나고 차의 에어컨을 틀지 않고는 여행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무더웠다.
그런데 갑자기 아침저녁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가을의 기운이 물씬 묻어난다. 아직도 한낮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요즈음은 하루가 계절을 펄쩍펄쩍 건너뛰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덧 날짜는 팔월하고 중순이다. 계절에 미사일이 달려 있는 것인지 하늘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 같다.
일주일의 휴가를 마치고 사무실에 출근하자 모든 감각이 정지되어 버렸다. 비록 몸은 사무실에 출근했지만, 마음은 멍하니 바깥세상을 바라보며 시간만 태우는 신세다.
무언가를 하고 싶어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버겁기만 하다. 늦여름의 무더위가 물러나는 것이 못내 서운한지 나무에서 말매미 울음소리가 높아만 간다.
나무에 매달려 우는 매미가 목청을 돋우는 것을 보니 여름도 끝자락을 향해 가는 것이 틀림없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의 무더위가 차츰차츰 물러난다는 생각이 들자 가을이 서서히 고개를 내민다.
팔월 한 달 중 일주일은 휴가를 가고 휴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나면 근무하는 날짜가 며칠 되지 않는다. 직장에서 팔월이면 휴가 가는 사람이 많아 해야 일도 별로 없다.
직원이 휴가를 가면 업무의 능률성과 효율성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일 년 중 팔월은 대충대충 시간을 보내는 달이고 가을을 맞이하는 달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느슨해질 때 가을은 그 느슨한 틈새를 비집고 슬금슬금 찾아온다.
가을이 다가온다고 무언가를 준비해 놓을 것은 없지만 그래도 여름보다는 가을이 좋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풍요의 계절이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가을이 되면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창문을 열어젖히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더운 바람이 불어오더니 어느새 여름의 창문 바람과 가을의 창문 바람이 달라졌다.
사무실 창가에도 가을의 냄새가 물씬물씬 배어난다. 계절이란 손님은 우리가 바라볼 수 없는 곳에서 서서히 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하늘의 구름에도, 사무실 뒤편의 공사장에도, 아침부터 사무실 마당을 청소하는 청소기의 바람에도 가을이 내려앉고 있다.
여름이 끝나가자 가을이 자신의 자리를 잡기 위해 곳곳에서 몸부림친다. 사람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으라고 하면 그냥 내어주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에 앉는 사람을 향해 “어디 잘 사나 두고 보자.”라는 가시 돋친 말을 하며 내어놓는다.
계절도 사람처럼 여름의 자리를 내어주기가 몹시 싫은 것인지 한낮에는 가을이란 말조차 꺼낼 수 없을 정도로 무덥다. 여름이 순순히 물러날 수 없다는 저항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아무리 여름이 한낮에 더위를 쏟아내도 아침과 저녁에는 어쩔 수가 없다.
가을은 영리하게 밤낮으로 온도를 조절해 가며 여름의 무더위를 서서히 몰아낸다. 가을은 스스로 앞가림을 해가면서 사람들 앞에 낮고도 조용하게 준비하며 다가온다.
이제는 무더운 여름보다 결실의 계절 가을을 노래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더불어 홀로 깊어 가는 가을의 고독과 외로운 시간을 반주 삼아 가을노래나 목이 터지도록 불러보고 싶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