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by 이상역

리무진 버스에서 내려 인천 국제공항 출국장에 들어섰다. 여행을 함께 가는 일행을 만나기 위해 공항청사 3층 A, B 데스크 앞으로 갔다. 이번에 뉴질랜드와 호주를 안내하는 여행사는 ‘여행사랑’이다.


지정된 데스크에서 기다리다 여행 안내자와 일행을 만났다. 일행 중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가이드에게 여행에 필요한 주의사항을 간단하게 듣고 일행의 참석 여부를 점검했다. 가이드가 참석자 점검을 마치더니 먼저 여행 가방을 부치고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를 밟으라고 안내한다.


그리고는 비행기가 출발하려면 한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출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의 면세점에 가서 각자 볼일을 보고 비행기 출발시간 전까지 지정된 게이트로 모이라 하고는 제각각 흩어졌다.


나는 일행과 출국 심사를 끝내고 공항의 면세점에 들어가 물건을 구경했다. 여행 첫날부터 살 것이 없어 면세점을 한 바퀴 돌며 눈요기나 했다. 공항 면세점을 한 바퀴 휘휘 둘러보고 비행기가 출발하는 게이트 앞 소파에 앉아 공항의 밤 풍경을 구경하는 중이다.


공항의 창문 밖에는 비행기가 연신 붉은 연기를 쏟아내며 이착륙을 반복한다. 그 연기 사이로 저 멀리 영종도 시내의 가로등 행렬이 창연하게 다가온다.


이번 여행에 함께 하는 일행은 30명이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출국 심사를 마쳤다. 공항의 창문 밖에는 어두운 사위가 살포시 내려앉아 비행기와 활주로의 점멸등만이 꿈틀대며 살아 움직인다.


몇 분 간격으로 반짝이는 빨간 점멸등으로 이어진 선을 따라 육중한 기체를 움직이는 비행기. 마치 커다란 고래가 바다를 부드럽게 유영하듯이 활주로를 미끄러져 올라가고 들어오는 모습이 끝없이 이어진다.


비행기는 미지의 세계를 안내하는 또 다른 새의 눈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따라 여유롭게 움직인다. 하늘을 유영하며 새로운 세상을 안내하는 비행기. 공항은 청춘 시절 한때의 추억이 간직된 곳이다.


공항은 이별과 만남이 교차하지만 새로운 만남과 이별도 낳는다. 내 삶에서 공항에 근무했던 추억은 지나간 것이 되었지만, 젊은 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가을날의 쓸쓸함처럼 공항에서 느끼는 온기는 썰렁함과 규모에 눌리는 중압감이다.


공항의 면세점에 진열된 물건만큼이나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타기 위해 오고 간다. 나의 청춘, 나의 영혼. 빛바랜 청춘의 그림자가 공항에서 나를 더욱 쓸쓸하게만 한다.


공항에 따뜻한 정을 주고 싶어도 마음이 따라가지를 않는다. 공항은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을 반겨 주지만 떠나는 사람도 붙들지 않는다. 비행기가 또 다른 만남과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공항의 활주로를 사뿐히 날아오른다.


비행기는 마치 하늘을 저어 가는 새처럼 반짝이는 불빛으로 자신의 흔적을 흩뿌리며 먼 곳을 향해 날아오른다. 지금 내 옆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귀에 익지 않은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


공항에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지만 한 사람도 알 수가 없다. 소파에 앉아 상념에 잠겨본다. 나를 싣고 먼 이국으로 날아갈 비행기를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여행기간 동안 잘 지내라는 말을 전해주며 통화를 끝냈다.


지금은 나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 운명인데 가족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 잘 지내라는 말을 전해주는 것이 전부다. 삶은 언제나 그런 것 같다. 서로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삶이 유지되고 서로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지금껏 생활해온 반복된 생활을 접고 가족 곁을 떠나려니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가족이란 울타리를 형성하고 아이들에게 책임이나 의무를 지운 적은 없다. 가족 곁을 떠나야 가족이 그리워지듯이 가족 곁을 떠나 외톨이가 되어야 자신이 누구란 것을 되돌아볼 수 있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다가올수록 마음은 초조해진다. 몸의 호흡은 가빠지고 목적지에 빨리 갔으면 하는 조바심도 생겨난다. 그곳에 도착하면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마음이란 상념은 잠시도 그냥 있지를 못한다.


공항은 눈물과 사랑과 기쁨과 환희가 교차하는 곳이다. 이별이 서러워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연인의 모습. 그리운 고국을 등지고 홀로 외국을 향해 떠나는 사람이 신비스럽다. 공항의 소파에 앉아 하염없이 비행기를 기다리자니 마음은 한없이 고독하고 외로워만 간다.


공항 안내원의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로 들려온다. 앞 비행기의 출발 지연으로 늦어진다는 소식이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의 부담은 배로 상승한다.


약속된 시간에 비행기가 출발하면 좋으련만 외국에 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인가 보다. 비행기가 하늘로 솟아올라야 몸이 따라가는데 이륙하지 못하면 모두가 한바탕의 꿈이다.


내가 살아온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원하는 길을 가겠다고 무수히 외쳤지만, 원하는 길은 한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다른 길을 걸어왔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지연되어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아 있으니 공항의 천장에서 쏟아지는 중력의 압박감과 썰렁함에 몸만 잔뜩 움추러든다.


그렇다고 지금 마땅하게 할 것도 없고 소파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만만치가 않다. 지금까지 내 삶은 손에 무언가를 잡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무언가를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마음이 편했다.


평소에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온 세월이다.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고 할 일이 있다 해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가로등이 반딧불처럼 출렁이는 공항의 창밖이나 바라볼 수밖에 없다.


드디어 공항의 안내원이 KE823편을 타고 뉴질랜드 오클랜드로 가는 사람은 비행기에 탑승하라는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온다.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리자 뉴질랜드로 가려는 사람들이 냇물에서 먹이를 본 물고기처럼 무리 지어 게이트로 모여든다.


나도 일행과 여권과 비행기 표를 손에 들고 승무원에게 내보이자 탑승해도 좋다고 미소짓는다. 한 손에 작은 손가방을 들고 미로처럼 생긴 통로를 지나 비행기 기내로 들어가 예약한 좌석을 찾아갔다.


지정된 좌석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자 비행기가 엔진의 출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마치 백 미터를 달리기 전 선수처럼 비행기가 엔진의 출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이어서 출발하라는 신호에 맞춰어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하늘로 솟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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