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굴레에서 이탈
낯선 마을에 당도한다.
빈 들에서 바람이 불어
먼바다에 선 구름이 솟는다.
그리움이
야성의 소리를 울어버리고
하늘빛, 풀빛 그 사이에
무섭게 번져가는 원의 빛깔이
붉게 붉게 불타는 해와 달
내 그리움은 바람에 날려가고
나는 한 마리 짐승으로 언덕 위에 선다.
고향 소나무밭 그늘에 누워 생각한다.
낯설기만 한 이 마을에서 나는 누구인가
누구를 찾아왔는가(박이도, ‘고향’).
시골집의 지붕이 새마을 운동이란 거센 횃불 아래 짚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농가에서 생산되는 짚 대신 공장에서 생산되는 석판으로 지붕을 바꾼 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초가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면서 초가보다 추억이 많이 생길 것 같은 꿈과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몇 번의 여름과 겨울이 지나면서 꿈과 희망을 얻기보다 빼앗긴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붕이 초가일 때는 처마에 깃들어 사는 새도 만나고, 고드름도 따 먹으며 동심을 달랬다. 게다가 비가 내리는 날에는 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종이 풍차까지 돌리며 놀았다.
어느 날 지붕이 짚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자 새도 없어지고, 고드름도 맛볼 수 없게 되었다. 더군다나 슬레이트를 타고 떨어지는 빗물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접근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초가지붕의 처마를 타고 흘러내리던 그리움과 향수. 초가집을 둘러싼 엉성한 돌담에 갇혀 건넛방에서 부르던 추억의 옛 노래. 이제는 아련한 그리움의 시간이 되었지만, 시골집 마당에 들어서면 옛 그리움의 날들이 무시로 떠오른다.
나도 시인처럼 고향을 방문할 때면 낯선 마을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산과 들녘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과 함께 천천히 낯익은 마을로 변해갔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아! 이곳이 정녕 내가 그리워하고 애타게 찾으려고 했던 고향인가 하는 향수와 그리움에 젖어든다.
고향은 옛 그리움과 원초적 꿈을 태동시키는 곳이다. 초가집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고,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그리움의 빗방울을 산란시켰다.
앞산 너머 낯선 세상을 동경하며 호기심을 먹고 자라던 유년 시절. 그 시절 시골집 앞산만 넘어가면 읍내가 나오고 넓은 대처가 나올 것이란 희망에 부풀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내가 살았던 시골집은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은 채 아직도 옛날 그대로다. 고향에 들러 이리저리 눈을 돌려봐도 변한 것은 별로 없다.
고향에 사는 익숙한 얼굴이 보고 싶어 찾아가면 사람의 자태만 변했을 뿐 산천은 그대로다. 시인은 고향의 언덕 위에 선 자신의 모습을 짐승이라고 표현했다.
고향을 찾아가도 반겨주는 이가 없고, 무성하게 자란 풀과 나무로 인해 예전의 고향을 느낄 수 없어 짐승으로 묘사한 것 아닐까.
오랜만에 찾아간 그리운 고향. 고향의 대지와 하늘을 이리저리 둘러봐도 사람 냄새나는 그리운 모습은 만날 수가 없다. 그저 무성하게 자란 풀과 산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바람만이 쓸쓸함과 무상함을 노래한다.
고향의 변변한 모습이나마 보고 싶어 찾아왔건만 모두가 빛이 바랬다. 고향에서 뛰어놀던 그리움의 날들은 사라지고 머리를 풀어헤친 숲처럼 준비되지 않은 시간만이 그리움과 애증을 부여안고 비슬거린다.
시골집은 아직도 지붕에 슬레이트를 머리에 이고 세월의 사라짐을 노래한다. 비록 아버지가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시골집의 슬레이트를 걷어내야만 한다.
그 누가 지붕의 슬레이트를 걷어낼 수 있을까. 글쎄다. 아무도 그것을 걷어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어머니도 형제들도 나도 그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한다.
비록 낡고 닳아빠진 슬레이트지만 거기에는 아버지의 삶과 꿈과 생애가 담겨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시골집과 고향은 옛것 그대로다.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이 사용하다 남긴 집이나 가구 등을 그대로 보존하기를 좋아한다. 비록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남겨놓은 것은 별로 없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그 누구보다 훌륭하고 소중하신 분이다.
내 삶의 그리움은 고향이고 현재를 살아내는 힘의 근원도 고향이다. 고향은 세상을 살아가는 어려움과 목마른 갈증을 풀어주고 달래주는 따스한 자리다.
비록 고향의 시골집 지붕이 짚에서 슬레이트로 바뀌면서 유년의 꿈을 앗아 갔지만, 그곳에는 옛 시절 초가에서 꿈꾸었던 동심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립고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