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자의 유러피안 리더십
흔히들 말하는 ‘윗사람’, ‘갑’, ‘사장님’의 권위 앞에 작아지는 게 우리 문화입니다. 우리는 그런 직위를 가진 분들이 돈을 많이 받고 일을 더 열심히 하는 만큼 결단력이 있고 우수하기를 바랍니다. 높으신 분들이 지휘하는 대로 따르고 그 안에서 성과를 내는 것이 익숙하죠. 그리고 그만큼 권위에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일반 팀원이 주어진 일을 잘하는 것이 덕이듯, 큰 그림을 그리고 배를 나아가에 하는 역할은 리더가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제가 봐온 네덜란드, 영국, 독일의 회사에서는 리더로 인정을 받고 싶다면, 조금 더 다른 리더십과 인재상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주어진 일만 해서는 아무리 그 일을 완벽하게 해도 승진이 어렵습니다. 리더는 바쁩니다. 일을 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마저 시간이 없어 힘들 수 있어요. 그런 리더에게 인정을 받으려면 그 리더의 위치에 서서 어떻게 그를 도울지 궁리해야 합니다. 매니저가 그의 매니저에게 인정받고 빛을 받으려면, 무엇을 필요로 하나요? 동료가 고생하고 있다면, 그 동료를 도와 함께 성공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희 팀에 두 주니어가 있었습니다. 한 분기에 업무가 줄어들어 두 팀원 모두 시간이 남게 되었나 봐요. 그런데 한 명은 불평을 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적인 자극이 줄고, 이런 류의 프로젝트는 우리 팀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그 시간에 건의 자료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매니저의 매니저였던 제게 발표를 했습니다. 주어진 일은 두 사람 모두 잘 끝냈지만, 주어진 일이 부재할 때에 둘의 자질 차이가 보이더군요. 누구라도, 혼자서 알아서 길을 찾고, 회사를 위해 고민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리더의 말을 혹은 말만 그대로 수용하는 예스맨은 성공이 어렵습니다. 자기 의견이 없어 보이거든요. 특히 유럽의 리더들은 팀원들의 의견을 많이 물어봅니다. 유럽의 국가들 마다 차이가 있지만, 네덜란드, 독일, 영국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나를 따르라’는 리더상은 보기 어렵습니다. 요새는 더욱 직장 내의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 특히 자신이 관리하는 팀원들의 의견을 모두 들어보고 수용하거나 합의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많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앵무새처럼 ‘OK’, ‘그러죠 뭐’, ‘그래요’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영어 표현 ‘whatever’ 처럼 들립니다. 관심이나 열정이 부족해 보이고, 나아가 ‘네가 시키니 억지로 하겠다’는 말처럼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또한 이커머스, 메타버스 등 급변하는 환경에 필요한 지식을 빠르게 익혀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나이가 있는 리더들은 너지시 물어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혜안을 갖춘 ‘어른’의 리더상보다는 아마 팀원들보다 더 모르거나 부족해 보이는 리더상과 일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그런 점을 자신이 드러내는 솔직한 스타일의 인재상도 많고요. 그런 리더에게 기대어 모든 일에 대한 정답을 원하려고 한다면 갈등이 있겠죠. 함께 그 리더와 고민하고 공부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반대로 속으로 ‘왜 이렇게 부족한 사람이 리더가 되었나’, ‘리더가 별로니까 팀이 별로다’하는 자세는 자신의 일에 대한 만족도를 깎아내는 지름길입니다.
제 인생을 아주 힘들게 한 프랑스인 상사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스타일 리더십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인 것으로 손을 꼽는데요. 도저히 그 사람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더랍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미팅이 있을 때마다 이메일에 적어 보내, 나중에 다른 말을 할 때에, 그 이메일을 다시 보내 상기시키라는 충고도 들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가 말을 몇 번이고 뒤집는 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잘잘못을 가린다고 제 회사생활에 낙이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직 생활에 탑이라는 동료에게 자문을 구했죠. 그가 한 말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그를 빛내줄 성과를 찾아서 주어라. 그게 뭔지는 상관이 없고, 그가 뭘 원하는지 보다도, 쉽게 말해 제 전문성을 바탕으로 그가 광 팔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라고 하더군요.
인사고과에 가장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매니저입니다. 그런데 그 매니저와 마음이 맞지 않으면 회사생활이 정말 지옥 같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잘 맞으면 회사생활이 더 편하겠죠. 묵묵하게, 조용히 주어진 일만 열심히 잘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히 일을 열심히 잘한다는 말은 이렇게 번역될 수 있습니다. 회사에 대한 열정이 없어서 하라는 것만 딱 끝내는 사람. 다 알려주고 시켜야만 일을 하거나 팀 플레이를 하지 않고 자기 일만 잘하는 사람. 문제가 생기면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고생하기보다는 남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사람. 실제로 이런 팀원이나 동료들을 종종 보아왔는데, 연봉에 대해 불만이 있거나, 승진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경우였습니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자진해서 조용히 주어진 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리더십 계발에도, 자질만큼 인정받는 데에도 좀 위험할 수 있어요.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일에만 노력을 쏟으면 서프라이즈가 없습니다. 아무리 과정이 힘들었어도 약속한 업무를 마쳤으니 당연한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니 하라는 일만 하기보다는, 거기에는 가능하다면 70%만 쏟고, 나머지 30%를 상사와 팀을 위해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을 주체적으로 제안하고 실천해보는 게 능력을 보여주는 더 수월한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