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니커버드 - Gentle Breeze
어느 음악가사에는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첫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이 표현에 너무도 공감할 것이다. 나에게 첫사랑은 강렬한 짝사랑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중학생에 들어갈 무렵, 풋풋한 설렘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렸을 때 너무도 소심한 나와는 반대로, 그 사람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줄 알고 성격도 활발했다. 나는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몰래 좋아했다. 첫사랑만 생각하면 옥시토신이 샘솟는 듯 하루가 행복으로 가득 차고 또 어떤 날은 우울증이 온 것 마냥 급격히 슬픔이 밀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소심하게 마음 한 번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대신 싸이월드라는 사이트를 통해 첫사랑을 몰래 탐방하곤 했다. 싸이월드는 지금의 카카오톡이나 인스타처럼 자신의 페이지를 꾸미고 배경음악을 넣을 수 있는 기능이 있는 홈페이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려서 아직 폰도 없던 그 시절, 컴퓨터로 싸이월드를 매일 들락거리며 그 사람의 취향인 음악들을 들었다. 혹시나 이 노래 가사의 주인공이 나인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으로 가득한 채 말이다. 그렇게 매일 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어느 순간 첫사랑의 음악들이 나의 음악 취향으로 스며들고 말았다. 그리고 그 노래들을 들으면서 언젠가 이 사람과 행복한 순간을 맞이할 날을 꿈꿨다.
그렇게 사 년간의 짝사랑을 이어가던 중 연상인 그 사람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 사실마저 싸이월드로 알아차렸고 마음은 너무 혼란스러웠다. 나만 혼자 좋아했던 거였나. 오랜만에 밥을 먹자는 그 사람의 연락에 사실은 누나를 좋아했다는 문자를 보낸 채 긴 짝사랑이자 첫사랑의 끝을 고했다. 그러나 여전히 수능공부를 하면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짝사랑했던 순간들이 몽실몽실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중에 성인이 돼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며 고등학교 시절을 버텼다.
♪또 하루가 가고 아침이 오고
구름 사이 스미는 향기에 취해
그림 같은 정원에 기대어 서면
꿈처럼 니가 날 부르지
♪널 볼 수록 정말 기분이 좋아
포근하게 스미는 저 바람처럼(like a gentle breeze)
부드럽게 내 볼을 감싸는 너의 시선이 느껴지는 건
볼 수 없어도 난 알 수가 있는걸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 대학생활에 빠져 열심히 놀던 중 다시 한번 첫사랑과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고대하던 그 사람을 다시 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하철역에서 멀리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누나를 보자 여전히 멋있는 모습에 오랫동안 누르고 있던 강렬한 감정이 다시금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그 사람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어 이번에는 빼빼로데이를 노려 다시 한번 고백했지만 또 차이게 된다. 그래도 좋은 동생으로 남기로 했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설레는 감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결국 차마 글로 옮기기 민망한 온갖 이불킥 할 상황들을 격은 끝에, 우리는 마침내 연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좋아했던 시간과 다르게 허무하게도 한 달도 채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다. 너무 좋아한 만큼 그 사람 앞에서는 어릴 때의 나처럼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과 서로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가 달라서일까. 그렇게 오랜 내 첫사랑은 완전히 끝이 났다. 붙잡고 싶었지만 매정하게 카톡만 남기고 떠난 그 사람을 한동안 잊지 못했다. 그리움과 분노, 우울의 감정들이 뒤엉켜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물론 시간이 약이란 말처럼 어느 순간 그 사람에 대한 감정들과 기억들이 희미해져 갔지만 그럼에도 나중에 한 번은 꼭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다. 여전히 내 감정은 설렐지. 아니면 분노만이 남았을지.
나이가 먹고 다른 연애를 하면서 가끔씩 이 사람의 대한 감정을 복기해 본다. 나중에 만나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그럼에도 고마웠다고 말할까. 아니면 그렇게 마무리를 지어야 했냐고, 좋게 헤어질 수는 없었냐고 따질까. 나도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그렇게 가끔씩 찰나의 생각들로 밤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흘러 삼십 대가 되면서 부질없는 생각들임을 깨달음과 비로소 놓을 수 있었다. 그토록 추억하던 것은 그녀가 아닌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했던 그때의 내 감정은 아닐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말이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부터 다닌 치과를 다녀왔다. 이곳은 특히나 첫사랑을 처음 알게 된 장소와 가까워 종종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그 기억을 떠오르곤 했다. 이제는 도로부터 건물까지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해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기 힘들어졌다. 이제 내 마음도 점점 그렇게 변화하는 것 같다. 더 이상 그 사람은 고마운 존재도 원망의 존재도 아니다. 그저 내 첫사랑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람으로 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