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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류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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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May 29. 2023

3. 아반롱반(2)

    현준은 즉시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제발 방 청소 좀 하라는 형의 잔소리에 못 이겨 물티슈로 집안 곳곳을 닦아대었다. 왠지 모르게 힘이 불끈 솟아서 바닥에서 광이 날 지경이었다. 청소를 끝내고 나니 마침 30분이 지났기에 현준은 아까 풀지 못한 문제를 마저 풀기로 했다.

    "어라?"

    현준의 꽤 큰 목소리에 잠이 들랑 말랑 하던 형이 비몽사몽 물었다.

    "왜 그래, 메스꺼워?"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게 아니라... 이걸 왜 몰랐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딱 보면 27인데."

    드디어 현준이 공부에게 간택받은 순간이었다.

    "얘 봐라. 어때! 인간이 된 기분이. 어떠냐!"

    "와... 이거..."

    미쳤네요. 현준은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동수가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너는 지금껏 딱 보면 답이 튀어나오는 삶을 살고 있었던 거야. 동시에 신이 난 형은 냉큼 병원 주소를 알려주었다.

    "짜식. 메시지로 병원 주소 보냈어. 너 다음 학기 1등 하면 나한테 밥 한번 거하게 쏴."

    다음 날 현준은 일어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라 마음 한 편이 콕콕 찔리기도 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붕어 한 마리가 사라지면 전 국가적으로도 이득인 거잖아?'

    혹시 몰라 ADHD 증상에 대해 공부도 해두었지만 룸메이트 형의 말대로 병원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저 ADHD 약 좀 받으러 왔습니다."

    "예예. 한 달 치 드릴 테니까 하루 한 알 드시면 되고요. 밥 먹고 30분 이내에, 저녁보다는 아침이 좋고요."

    1분도 안되어서 약을 처방받았다. 이렇게 쉽다고? 현준의 기분은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이제 현준은 매일 붕어에서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게 되었다. 에라 기분이다! 오늘 점심은 피자를 먹기로 했다. 피자는 식후에 찾아오는 혈당스파이크가 졸음을 유발하기 때문에 10대 금기음식으로 지정해 두었지만, 어차피 집중을 잘할 거니까 뭘 먹든 상관없었다. 피자를 다 먹은 후에 콜라와 함께 약을 챙겨 먹으며 생각했다.

    '도서관까지는 걸어서 20분. 편의점에서 박카스 하나 사가면 완벽하겠군.'

    박카스를 사서 도서관에 자리를 잡은 현준은 감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플라시보 효과 따위가 아니다. 분명 수십 번은 읽어야 이해가 되던 전공책이 두 번만에 이해가 되었다. 영문책을 읽는데도 마치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부드럽게 읽히면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족히 세 시간은 걸렸을 분량이 한 시간도 채 되기 전에 끝났다. 오늘 해야 했던 두 과목의 복습과 두 과목의 예습이 다 끝났을 즈음, 시계는 고작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시까지 무려 여섯 시간이나 남았다니.'

    현준은 도서관 지하에서 세 권의 전공책을 급히 대여해서 예습을 시작했고, 새벽 세시가 되었을 때는 푹 자고 일어난 듯 상쾌한 표정으로 도서관을 떠났다. 그렇게 현준은 남은 한 달의 방학 동안 이전 학기 과목 복습과 다음 학기 과목 예습을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다음 학기 1등은 현준에게 따놓은 당상이었다.


[한 달 후]


    고대하던 2학기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현준의 실력을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아침밥을 챙겨 먹고 박카스와 함께 알약 한 알을 먹는다. 2학기의 수업은 대부분 매주 퀴즈를 보기 때문에 개강과 동시에 현준의 실력을 드러내기 좋은 환경이었고, 그의 예상대로 퀴즈는 탄탄대로였다. 막힘 없이 뚫린 고속도로처럼 휙휙 풀렸다. 동기들은 일제히 현준을 부러워했고, 그중 몇몇은 불순한 마음을 드러내어 비아냥거리거나 욕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럴수록 현준의 기분은 하늘을 찔렀다.

    '시기와 질투를 감내하는 것, 이게 1등의 삶이지.'

    한창 수업이 진행되던 어느 날, 현준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약빨은 보통 12시간이면 사라진다. 방학 때는 점심에 약을 먹고 오후 내내 공부를 한 뒤, 집중력이 떨어질 새벽 즈음 집에 돌아가면 완벽한 루틴이었다. 그런데 개강한 후로는 오전 수업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아침 8시에 약을 먹다 보니 저녁부터는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졌던 것이다. 여태 매일 하루에 한 알의 약을 먹는동안, 정말이지 아무 이상도 없었다. 그러니 두 알을 먹는다고 해서 그렇게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게다가 12시간의 간격을 두면 이미 약빨이 떨어진 이후에 먹는 것이므로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현준은 슬그머니 룸메이트 형과의 약속을 어기고 하루에 알약 두 알을 먹기 시작했다. 이때쯤부터였을까, 현준은 약을 먹어도 집중력이 그렇게 좋아지지 않는다고 느끼기도 했다. 물론 처음 세 시간 정도는 집중이 잘 되었다. 이전에는 얼마나 멍청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속도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아침에 약을 먹고서도 점심시간이 채 되기 전에 꾸벅꾸벅 졸기도 했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진도를 놓치는 일도 잦아졌다. 한동안 겨울 잠을 자던 현준의 불안이 눈을 뜨고야 만 것이다. 현준은 부글거리는 불안을 감당할 수 없었고, 중간고사 시기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하루에 약을 네 알씩이나 먹고 있었다. 약을 먹기 위해 네 끼나 먹다보니 살이 10킬로 넘게 불었고, 약을 먹지 않으면 금단현상으로 손이 덜덜덜 떨리기도 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그렇지만, 약만 먹으면 바로 사라지는 손떨림, 그리고 편안함이 현준을 토닥토닥, 안심시켜 주었다.

    대망의 중간고사 날이 다가왔다. 어쩜 시험은 꼭 같은 날에 다 몰리는지, 하루동안 무려 세 과목의 전공 시험을 봐야 했다. 시험 시작 시간은 각각 오전 8시, 10시, 그리고 오후 2시. 현준은 문득 생각했다.

    '어차피 하루에 네 알 먹는 거, 오늘 하루만 시험 보기 직전마다 약 먹고 들어갈까?'

    아직 두 시간 간격으로 먹어본 적은 없지만 지금까지 큰 부작용을 느낀 적도 없었고, 하루쯤은 괜찮을 듯했다. 대신 시험이 끝나자마자 집에 가서 푹 자면 된다. 7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 먹은 현준은 시험장 앞에서 알약을 먹고 8시에 보는 첫 시험을 아주 성공적으로 마쳤다. 만점일 것 같은 느낌. 아직 약빨이 남아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혹시 시험 보는 중에 약빨이 떨어지면 큰일이니 두 번째 시험장 앞에서 한 알을 더 먹었다. 두 번째 시험을 보는 현준은 심장이 터질 듯 설레어왔다. 막히는 문제가 단 한 문제도 없었다. 현준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삐져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시험을 보며 빨개진 얼굴로 피식 거리는 현준의 모습은 어쩌면 기괴하기까지 했다. 출제된 모든 문제를 다 풀었는데도 고작 30분이 막 지나있었다.

    '뭣하러 시험 시간을 두 시간이나 줬대. 30분이면 다 풀겠구먼.'

    지루해진 현준은 검산을 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하여 시험지를 제출하기로 했다. 짐을 대충 싸고 일어난 현준은 뻑, 하는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에서 난 소리였다. 현준은 직관적으로 뇌가 터졌다고 생각했다. 머리에서 피가 나는지 확인하고자 손을 들으려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 읍..."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이, 눈동자도 굴릴 수 없이, 숨을 쉴 수도 없이. 귓속에서 삐--- 하는 경고음이 들렸고, 이는 마치 심장이 멈추었다고 알리는 듯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초점 없는 눈으로 서서 현준은 소리치고 있었다. 다만 입 밖으로 아무 소리를 낼 수 없었을 뿐이었다. 제3자가 봤을 때는 그저 한 학생이 시험 도중에 일어나 칠판을 바라보는 모양새였다. 조교와 현준의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고개를 왼쪽으로 갸웃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현준은 차라리 쓰러지고 싶었다. 쓰러지면 누구라도 다가와서 자신의 의식을 묻고, 119를 부르겠지. 현준은 그렇게 선 채로 숨이 끊어지고 있었다.

    쿠당-창-

    마침내 현준은 동상처럼 무너졌고, 학생들의 괴성이 시험장을 가득 메웠다.


    현준이 눈을 뜬 이후의 첫 기억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자신을 찾아온 의사 선생님이었다.

    "이현준님, 돌아가실 뻔하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심장이 두 번이나 멎으셨어요."

    현준은 세 번째 시험을 보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온몸이 마약으로 가득해서 중화제로 희석 중에 있습니다. 체내 마약 농도를 보니 최소 한달 이상 과다복용하신 것 같던데요."

    현준은 세 번째 시험이 F 처리될지, 지금이라도 보게 해 줄지 알고 싶었다.

    "ADHD인 척하고 상습적으로 약을 투여받으셨더라고요. 불법인 거 아시죠? 왜 그러셨어요. 집중력 높이려고 그랬어요? 아무리 그래도 마약을 드시면 어떡합니까."

    "... 서... 언... 생... 니임..."

    현준의 목소리가 끝도 없이 갈라지고 있었다.

    "네 말씀하세요."

    "... 선... 생님이... 무...무얼... 아는데...요..."

    심장 부근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누구라도 자신의 심장을 까뒤집어 식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한테 이번 중간고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선생님이 뭘 안다고 약을 먹으라 마라예요. 당신도 1등 대가리잖아요. 당신이 붕어의 마음을 뭘 안다고. 네가 뭔데요. 네가 무슨 자격이 있는데요.'

    더 이상 목소리를 낼 힘조차 나지 않았던 현준은 온 마음을 다해 의사 선생님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이보세요 이현준씨, 지금 죽을 뻔했다는 거 못 들으셨어요? 한 번 더 먹으면 죽는다고요. 이미 몸속이 마약으로 물들여져서 희석도 어려워요. 앞으로 한 알이라도 더 먹으면 그때는 정말... 정말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니까요!"

    "... 세요."

    '차라리 죽여주세요.'

    현준은 수도 없이 죽여달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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