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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류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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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May 29. 2023

3. 아반롱반(1)

   대학생이 되어 첫 여름 방학을 맞이한 현준은 저번 학기 수업 시간에 배운 '프로그래밍언어'를 복습 중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진작에 복습을 끝내고 '회로이론1'과 '신호및시스템'을 예습하고 있어야 했다. 한 과목 당 세 시간씩, 그러니까 새벽 세시에는 모든 과목을 마무리했어야 했다. 하지만 밤 12시가 넘었음에도 복습조차 끝내지 못한 건 이해가 되지 않는 한 문제 때문이었다. 강의자료를 다시 보고,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아도 자신이 틀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해설을 찾아볼 법도 한데 울그락 불그락 김을 뿜으며 이미 수십 번도 틀린 문제를 다시 풀기 시작한다.

    '망했어.'

    불안한 표정으로 손톱을 뜯는 현준의 타는 마음속이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공부를 하는 이유는 바로 저번 학기에 받은 학점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 늘 1등을 고수하던 현준이 중간에도 미치지 못하는 석차를 받은 것이다. 입학 첫날부터 도서관을 찾아 공부를 시작했던 현준이었다. 매일 할당된 공부량을 채우지 못할까 봐 개강총회도 MT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처참한 성적표는 당신은 평균보다도 못하다고, 그러니 분명, 당신은 저능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자신보다 공부를 더 많이 했기 때문에 더 좋은 성적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했다. 곰곰이 기억을 떠올려보면 수업 중에 뒷자리에서 오늘 저녁 회식하자는 둥,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자는 둥의 대화를 한 두 번 엿들은 게 아니었다. 심지어 수석을 차지한 동수는 바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학생회와 산악동아리를 하느라 수업을 땡땡이친 적도 더러 있었다. 진도를 따라가는 것조차 어려웠을 텐데.

    여름 방학의 어느 날이었다. 저녁 9시가 되도록 박카스만 마시며 공부하다 어지러움을 느낀 현준은 늦은 식사를 하러 후문 앞 분식집으로 향했다. 두뇌회전에 좋다는 청국장을 시키고 자리에 앉아있던 현준 앞에 동수가 나타났다.

    "현준, 오랜만이다 야. 그나저나 너 왜 이제 밥 먹냐."

    현준은 ‘1등’ 동수 앞에서 공부하느라 지금까지 한 끼도 못 먹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게. 어쩌다 보니. 너는?"

    "난 오늘 아침까지 술 마시고 하루 종일 잤지 뭐야. 다시는 술 마시나 봐라. 이모 여기 해장 라면 주세요!"

    동수는 토하는 시늉을 하며 연신 트림을 해대었다. 유난히 큰 어떠한 트림소리가 현준의 머리를 턱, 하고 내리쳤다. 아, 깨달았다. 이제야, 알았다. 멍청한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화장실 갈 시간도 아까워 방광염에 걸려가며 공부해왔던 자신과 달리, 우월한 부모를 만나 태생부터 1등인 놈들이 있다는 것을. 현준처럼 바등거리며 예습과 복습을 하지 않아도, 그저 책을 한 번만 읽어도 머릿속 도서관에 모든 내용을 복사할 수 있는 놈들이 있다는 것을. 동수는 현준의 속도 모르고 라면을 후루룩대며 마셔대더니 숙취가 가시질 않는다며 부랴부랴 자리를 떴다.

    억울했다. 미친 듯이 억울했다. 동수 저 자식은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나보다 세배, 아니 열 배는 효율적인 하루를 살고 있다. 그러니까 하루 중에서 2시간만 공부해도 현준이 20시간 공부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동수가 3시간을 공부한다 치면...'

    망했다. 3시간을 공부하는 동수는 24시간을 다 써도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현준은 바보 같은 머리가 원망스러워 퍽퍽 쳤다.

    '쓸데없는 대가리, 맞아도 싼 대가리, 붕어 대가리...'

    지금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문을 닫는 세시까지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6시간밖에 하지 못한다. 동수로 환산하면 0.6시간, 고작 30분가량의 시간이다. 현준은 모든 의욕을 상실해 버렸다. 공부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졌다. 아니, 이건 공부 네가 나를 거부한 것이다.


    대학생이 된 이후 12시가 되기 전에 기숙사로 돌아간 건 처음이었다. 침대에서 과자를 집어 먹으며 만화책을 보던 룸메이트 형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씨 귀신인 줄 알았네. 네가 웬일로 새벽에 안 들어오고. 무슨 일 있어?"

    현준은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우물쭈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혹시 형도 1등 대가리예요?"

    "대가리라니, 너 형한테 대가리가 뭐냐."

    현준은 뇌를 거치지 않고 나불거린 자신이 정말이지 붕어같았다.

    "죄송해요. 형도 우월한 머리를 가진건지 궁금해서요."

    "그럴 리가. 그러면 여기서 이렇게 배 긁으면서 만화 보겠니? 공부가 제일 좋아요 하면서 도서관에 있겠지. 너처럼."

    "아니, 아니에요. 저는 붕어 대가리예요. 그래서 매일 새벽까지 공부해도 1등 대가리가 세 시간 공부하면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형은 사뭇 심각한 현준의 표정에 만화책을 덮고 다가왔다.

    "왜 그러냐. 진짜 무슨 일인데."

    현준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현관에 놓인 신발 위에 털썩 앉아 울기 시작했다. 신발 굽이 차가운 현관 바닥 위에서 방석 역할을 해주었다.

    "저 진짜 대학 들어와서 공부밖에 안 했거든요?"

    "그럼. 알지. 너 매일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또 새벽에 공부하러 간 거 내가 알잖냐. 너만큼 성실한 애가 또 어디 있다고."

    현준의 앞에 서있던 형은 과자를 먹던 손으로 현준의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현준은 과자 냄새인지 눈물 냄새인지 참 짭짤하다고 생각했다.

    "이동수는 수업도 제대로 안 듣는데, 술도 마시는데, 시험 전 날에 벼락치기만 하는데, 근데 1등이에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고 공부만 하는데 중간도 못하는 저능아고요. 억울해 죽겠어요. 억울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요. 신은 왜 1등 이동수와 저능아 이현준을 똑같은 인간인 것처럼 만들어 놓은 거예요? 겉으로는 같은 개체인 듯 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족이라고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열심히 공부하면 1등 할 수 있다고 그랬잖아요. 새빨간 거짓말. 전 20년 동안 완전히 속고 있었다고요.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이라고? 같은 인간으로 묶어둔 이 종족에! 사실은 그 안에! 인간이 되지 못한 붕어가 콕콕 박혀있다는 걸! 저 같은 불량품이 존재한다는 걸! 저는 방금 그걸 깨달은 거예요."

    "야..."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정적을 깬 건 현준의 등을 토닥이던 형이었다.

    "현준아"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던 형은 곧 결심한 듯 현준에게 말했다.

    "너 혹시 공부 잘하는 약 이라고 아냐?"

    현준은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봤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매혹적인 약의 이름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씨, 이거 비밀인데. 너 이거 진짜 비밀이야. 알았어?"

    현준은 형의 단호한 목소리와 대비되어 흔들리는 눈빛이 느껴졌다.

    "대답해. 알았냐고. 평생 비밀 지킬 수 있겠냐고."

    "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비밀 지킬게요. 평생이요."

    "그래. 이렇게 된 거. 너한테만 공유해주지 뭐."

    "공부 잘하는 약이 뭔데요?"

    "처음 들어보지? 이게 말 그대로 공부를 잘하게 되는 약인데, 미국에서는 꽤 알려져 있지만 한국 애들은 거의 몰라. 내가 중고등학교 미국에서 나왔잖아. 아, 말 안 했나? 나 해외파야. 어때. 좀 달라 보이지. 움하하-"

    형은 팔짱을 끼고 역사책 속 명나라 황제처럼 웃어댔다. 현준은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새는 것을 느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형은 그런 현준의 표정을 보더니 팔짱을 풀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크흠, 아무튼 내가 중학교 입학했을 때 고생을 좀 했어. 영어도 새로 익혀야겠지 수업 진도도 따라가야겠지 정말 몸이 열개라도 부족하더라고.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 몰래 커피가루 씹어먹어 가면서 새벽까지 공부하곤 했지. 그때 잠만 잘 잤어도 키가 190은 됐을 텐데..."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리는 현준이었다.

    "알았어 인마! 거 참 이 아저씨 급하시네. 그러다 내가 어떻게 됐겠냐? 위장이 뒤집혀서 쓰러지고 난리가 난 거야. 그때 부모님도 한국에 있으니까 응급실에 간 나를 케어해 주실 분은 홈스테이 아주머니뿐이었어. 처음에는 낯선 아줌마가 응급실에 같이 있으니까 불편하더라고. 그런데 입원해 있는 동안 나를 정말 극진히 보살펴주셨다.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해. 그래서 무사히 퇴원할 수 있었지. 그리고 다시 학교를 다닌 지 한 2주 지났나, 아주머니가 선물이라면서 약통을 주시더라고. 그러면서 쌸라쌸라 말을 하셨는데 콕 박히는 단어가 있었어. darling, medicine, smart. 여기서 darling은 바로 나지롱."

    "그래서요? 그게 공부 잘하는 약이었어요?"

    "바로 그거지. 너 붕어 대가리 아닌데? 한 번에 이해 잘하네. 아니다, 말 잘하는 내가 1등 대가리인 건가? 아무튼 나는 그다음 날 아침에 'smart medicine'을 먹고 등교를 했어. 그런데 세상에. 1교시부터 약빨이 올라오더라. 금발머리 선생님의 수업이 너무 잘 들리는 거야. 분명 영어인데도 뭐라는지 알겠더라고. 과장 조금 보태서 한국말로 수업하는 느낌이었어."

    현준은 쿵쿵 거리는 소리에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틀림없이 현준의 심장 소리였다. 형은 그런 현준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너 뭐 하냐. 감명받았어? 웃기는 놈이네. 근데 이 약이 미국에서는 꽤 쉽게 구할 수 있는데 한국에 오니까 당최 어디서 파는지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이 몸이 검은 세계에서 발품을 좀 팔았지. 신기한 게, 그 약이 글쎄 ADHD 치료제라네? ADHD 환자들의 주의집중력을 높이는 약인 거였어. 그러니까 그 약을 먹으면 집중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공부를 잘하게 되는 원리였던 거다 이 말이야."

    현준은 지금이라도 당장 약을 먹고 싶어 졌다.

    "형 저 먹을래요. 저 먹고 싶어요. 저도 구해주세..."

    "쓰읍! 야 현준아, 좀 진정해 봐. 이 약은 위험해. 중독성이 강해서 의료계에서도 마약으로 지정했다고. 일단 지금 내 거 절반만 먹어보고 부작용이 없으면 하루에 딱 한 알씩 먹어. 내가 가는 병원 있는데 거기가 엄청 허술하거든? 그냥 ADHD라고 하고 약 달라하면 바로 줘. 대신 약속해. 아무리 공부를 더 잘하고 싶더라도 하루에 한 알 이상은 절대 먹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한 알만 먹을게요. 저 약속 잘 지켜요. 제발요."

    현준은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이리 와봐."

    형은 서랍 맨 아래칸을 열어서 새하얀 약통 속 새빨간 알약 하나를 꺼내 반으로 똑 갈랐다.

    "너 빈속 아니지? 이거 먹고 한 30분만 있다가 공부해 봐. 혹시 메스꺼우면 꼭 말하고."

    현준은 가방에 있던 박카스를 급히 꺼내서 알약과 함께 털어마셨다.

    "형 감사해요. 병원 주소 좀 부탁드릴게요."

    "내일 너 속 괜찮으면 그때 보내줄게. 난 다시 만화 봐도 되지? 울지 마 짜식아."

    현준은 정말 오랜만에 마음속 불안이 제 집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형... 이름이 뭐였죠?"

    온 힘을 다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룸메이트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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